'마산' + 3
- <창원공단의 기억>뿌리뽑힌 사람들, 뿌리내린 사람들 2023.05.23
- <노산 이은상과 대통령> 2023.05.16
- 해거름 카페지기가 들려주는 음악야화, 명곡의 탄생 2018.11.21
펴낸 날 : 2023년 05월 22일
가격 : 20,000원
반양장본 | 376쪽 | 152×225mm
ISBN 979-11-86351-59-8 0391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www.idomin.com
저자 : 이창우·강찬구
irondumy@idomin.com
책 소개
1974년에 창원공단이 설립된 이후
50년 만에 처음 기록한 휴먼 스토리
뿌리뽑힌 사람들의 아픈 상실의 기억과
뿌리내린 사람들의 벅찬 생성의 기억들
<들어가는 말>
<창원공단의 기억>은 창원기계공업공단(현 창원국가산업단지)에서 울고 웃은 사람들을 추적한 결과물입니다. 경남도민일보가 지역 언론사로서 지역민과 공유하고 싶었던 공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창원시는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로, 산업화의 상징적인 공간 중 하나입니다. 특히 중공업 중심지 창원기계공업공단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 과정은 산업사·도시사 차원에서 긍정적인 면만 다뤄졌습니다. 흔히 ‘신화’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원주민들이 받았던 고통이나 공장 구석구석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잊혔습니다. 즉, ‘사람’ 이야기가 빠져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진 기억은 그 내용에 따라 창원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할 수도 있는 구술 사료와 같습니다. 지자체·학계·지역 언론계가 공공의 기억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내용이지만, 안타깝게도 이제까지 누구도 이들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공단 건설 과정에서 이주하게 된 원주민 1세대들의 기억을 채록할 수 있는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기록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공단 건설에 젊음을 바친 옛 기능공들 중 많은 이들이 ‘창원 사람’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었습니다.
책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은 공단이 들어서기 전 옛 창원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를 밝혔습니다. 수십 곳의 자연마을이 있었지만, 지형적·문화적으로 당시의 생활양식을 대표할 만한 마을 몇 곳을 골랐습니다.
이어서 창원 땅이 공단용지에 수용되면서 원주민들이 반강제로 겪었던 고통을 파헤쳤습니다. 1974년 산업기지개발구역 지정 고시 이후, 동양 최장 8차선 도로였다는 기지대로(현 창원대로)가 깔리기 시작할 때부터 이들은 고향에서 쫓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는 이들에게 바둑판처럼 구획한 이주단지를 제공했지만, 땅을 생명으로 알고 농사일만 알던 사람들이 새로이 들어선 공단도시에서 살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전국에서 창원공단으로 모여 이주민의 도시를 만든 기능공들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원주민들의 한이 서린 땅 위에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들어 꿈을 펼친 이야기입니다.
창원 사람들이 창원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작업이 더 다채롭고 깊은 원주민·기능공 서사를 발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작가 소개
이창우
역사가 좋아 역사학도의 길을 걸었지만, 생계 고민 끝에 기자가 됐다. 배운 지식으로 제일 쓸모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늦은 나이에 <경남도민일보>에 입사한 것은 행운이었다. 어느 곳보다 민주적인 소유구조를 가진 언론사이고, 필요한 기사를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에. 경남 사람들의 성원 속에서 보람 있게 일하는 매일이 새롭다.
지역신문 기자의 역할이 현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역사를 배워서인지, 마침 경제부에 발령받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창원공단의 묻혀진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임무를 맡았다. 덕분에 역사학도일 때도 몰랐던 역사의 매력을 안참이다. 부산 출신이지만, 이제 ‘경남사람’이라 말한다.
강찬구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명절에는 울산을 오갔다. 경남은 지도 위에서, 지인의 이야기 속에서만 가까운 곳이었다. 첫 언론사 입사 도전을 <경남도민일보>로 하면서 가까워지나 싶었지만, 실패하고 다시 멀어졌던 경남이다. 그러다 삼십대 중반 늦은 나이에 불현듯 창원에 기자로 오게 됐다. 어쩌다 온 곳에서 본격적인 성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의 삶과 일을 배워나가고 있다.
철학에서 문화연구, 저널리즘으로 분야를 옮기며 학교를 다녔다. 이것저것 고루 흥미를 두는 ‘잘 꽂히는’ 성격이지만 뭘 해내거나 잘하는 건 없다. 양서를 싼 값에 사서 읽지 못하고 쌓아 올리는 것이 취미다.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라는 책에 아주 조금 기여해 놓고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차례
들어가는 말 ― 6
창원산단의 여명, 발전 신화의 빛과 그림자 ― 9
대통령 결단 앞서 지역에서 움튼 중공업화 노력 ― 23
마산 바다 건너 주렁주렁 포도 영글던 ‘귀한’ 땅 ― 31
분지 창원, 역사와 삶 쌓이고 흐른 산과 시내 ― 43
나락모티 갈대밭의 여름, 어제처럼 눈에 선한 ― 59
새 역사에 밀려 멀어진 창원 역사의 큰 줄기 ― 69
국가가 원주민 상처에 포개 얹은 ‘산업 대동맥’ ― 83
문전옥답 헐값에 앗아 만든 첨단산업의 땅 ― 97
포도송이 영글던 곳 붉은 황톳길만 남기고 ― 109
바둑판 구획에 끼워 넣은 원주민의 삶 ― 121
삶터와 생업 잃고 투기 광풍 휘말려 도시 빈민으로 ― 141
실향 아픔에서 끝나지 않았던 이주의 고통 ― 151
하고많은 사연 갈린 길에도 고향 마을 잊지 못하고 ― 159
창원과 원주민 역사 바로 알고 미래 세대 화합하길 ― 169
아픔으로 녹이고 염원으로 깎은 옛 창원의 두 상징 ― 179
듬성듬성 공장 땀 채워 세운 도시에 꿈도 피어나 ― 189
‘닦고 조이고 배우고 익혀’ 창원과 함께 커온 40년 ― 199
성냥갑 아파트에서 나눈 끈끈한 정 ― 207
공장 밖 마산서 낭만과 청춘 보냈던 근대화 기수들 ― 217
문학으로 물은 ‘산단은 무엇인가’ ― 227
부록 1. 창원국가산업단지 약사 ― 234
부록 2. 원주민 마을 편입 약사 ― 238
부록 3. 원주민 마을 유적비 일람 ― 241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창원(당시 창원군)은 30~40여 개 농촌마을만 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아스팔트 대로와 거대한 쇳덩이들이 들어섰다. 산업단지라는 국가의 ‘인위(人爲)’는 이곳 주민의 삶과 기억에도 크고 작은 발자취를 남기며 지역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창원에서 현재를 사는 이들 대부분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15쪽, 고향에서 밀려난 사람들)
창원산단의 탄생은 지역이 스스로 축적한 역량과 공단 유치 노력, 외국 기업의 판단, 이 모두를 고려한 정부 판단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최 박사는 시야를 좀 더 넓혀보길 주문했다.
(27쪽, ‘위대한 결단’ 아닌 복합 상호작용의 결과)
중·고등학교가 없어 삼귀국민학교(귀곡 소재) 졸업생은 모두 마산으로 진학했다. 귀현 출신 고영조 시인은 “당시 중학교 등록금이 180원이었고, 웅남호 뱃삯은 1원 정도 했다”라며 “하도 배가 고프다 보니, 표를 부둣가에서 파는 빵하고 바꿔 먹고는 배 뒤에 몰래 밧줄을 내려 매달려가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36쪽, ‘섬 아닌 섬’)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대규모 염전이 자리 잡았다. 나락모티 인근 창곡리(현 창곡산단)·덕정리(지금의 대원동)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국 해군이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광복 즈음 이곳에 넓은 염전이 펼쳐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62쪽, 멱감고 게 줍던 모래톱의 추억)
“상남역이 있는 곳은 면 소재지라 붐볐습니다. 역 남쪽으로 우체국·파출소·양복집·가구점에다 상남초등학교도 있었고, 상남극장이라고 극장도 있는 곳이었지요. 홍등가도 있었던 기억입니다.”
(72쪽, 사람 모여든 ‘핫스팟’)
말뚝이 박힌 곳마다 어김없이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대대로 부쳐 먹던 논마지기든 선조가 잠든 선영(先塋)이든 가리지 않았다. 농민들이 잃은 땅은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주단지로 떠나면서 겪은 고통은 눈부신 도시 발전의 그림자로 남았다.
“딱 우리 집 복판에 말뚝을 박더니…. 왜 그러는지 자세히 가르쳐주지도 않아요. 너희는 알 필요 없다고…. 제일 좋은 논도 평당 1300원, 밭은 200~300원. 그냥 강제수용이에요.”
(84쪽, 창원대로에 얽힌 이야기)
농사짓던 사람들이 논밭만 내주고 재산만 잃었을까. 도 작가는 부모님 이야기를 털어놨다.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대원동으로 이사 가고 나서도 한동안 연덕 남은 땅에서 배추를 키워 리어카에 싣고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셨고,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102쪽, ‘지금’이 앗아간 ‘그때’의 풍요)
고 시인은 “초가집들은 힘이 없으니까 불도저가 밀어버리면 금세 붉은 바퀴 자국만 남았는데, 내게는 그 모습이 꼭 우리 영혼이 흘린 피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 고모는 막내 사촌을 업고 불도저에 뛰어들었고, 또 어떤 사람은 운전수에게 똥물을 뿌렸다”라며 “지금 같았으면, 화염병이라도 던졌겠지만 그 당시 할 수 있는 저항의 전부였었다”라고 말했다.
(115쪽, ‘뿌리뽑힘’의 기억)
당시 택지 안에 네 가구까지만 짓도록 허용됐는데, 원주민들이 임대를 내려고 지하에도 옥상에도 막 방을 지었거든요. 지금은 벌금 때리고 원상복구 명령 내리는데 옛날에는 바로 행동으로 해버렸던 겁니다. 밤에 다 지어 놓고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못 부쉈기 때문에, 밤에 시멘트 바르고 나면 이불부터 갖다놨지요.”
(131쪽, 공장노동자 월세 받기 ‘특공작전’)
윤 시인은 “1·2·3차에 걸쳐 차례로 토지를 수용하고 이주가 진행됐는데, 그때마다 서울에서 내려온 투기꾼들이 빗자루로 토지를 쓸어담듯 했다”라며 “보상받은 이주민의 30~40%는 투기꾼에게 넘겼을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말했다.
(148쪽, 정착 못 하고 투기꾼에 집터 넘긴 사정)
“당시 중앙동 1번지, 지금 이마트 창원점 옆에 있는 곳이에요. 지도를 보면 주변 다른 곳이 전부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구획이 돼 있는데, 거기만 대각선으로 건물이 서 있어요. 어딘지 정확하진 않은데, 거기 사람들은 이미 이주를 와서 정착한 상태였죠. 그런데 그때 또 시에서 나가라 하는 상황이 된 거라.”
(154쪽, 자리 잡을 만하니 다시 나가라)
“봉림동 이주단지는 40여 개 원주민 자연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향우회도 연덕·창곡·월림 등 다 따로 조직돼 있어. 마을 규모가 작았어도 완암처럼 아직까지 활발하게 모이는 곳이 있고, 동네가 컸어도 단합이 잘 안되는 곳이 있지. 아이들도 향우회에 가입시키고 다른 마을 사람 자녀들과 같이 명절에 공도 차고 했는데, 직접 겪은 추억이 없다 보니 나이를 먹으면서 관심이 옅어져 안타깝기도 해….”
(167쪽, 옛터 유적비에서 추억 더듬어)
“삼원회관이 있는 상남동은 시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집결하는 곳인데 제대로 된 문화공간이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삼원회관을 원주민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창원의 역사와 개발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또 새로운 문화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 되게끔 꾸려나가고 싶습니다.”
(175쪽, 원주민 염원 담은 보금자리 돌려드리고파)
“석재상을 수소문하다 보니 큰 산 밑에 자연석을 무더기로 모아놓은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강원도까지 가서 찾는 중에 마음에 드는 돌이 딱 하나 있었는데, 63빌딩 표지석으로 세우려고 구두 계약된 돌이라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창원기계공단 설립 과정에서 희생된 원주민들 사정, 유허비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 마침내 돌을 구할 수 있었죠.”
(180쪽, 종 보고 돌 찾으러 방방곡곡에)
학교 동기 900여 명 중 함께 입사한 사람만 120명이다. 이는 당시 삼성중공업이 창원기계공고와 결연하고 유능한 학생을 미리 선점했기 때문이었다. 실습 장비를 대주거나 졸업 전에 일본어 교육을 하는 등 신경을 쏟다가, 우수한 학생들을 우선 추천받았다. 김 시인은 “다니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학교로 돌아와도 좋다는 조건으로 왔다”라며 “당시 공고 졸업생들이 잘 팔리던 때라 실제로 2번이든 3번이든 학교에서 취직시켜준 사례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195쪽, 첫 발을 디디다)
“월급 많지 숙소 있지, 처음엔 너무 좋았는데 어느 순간 안 되겠는 거야. 하나둘 공부를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동기 98명 중 60명 이상이 전문대나 4년제 대학에 갔어요. 회사(대림자동차)에서 난리가 났죠. 저녁에 잔업을 좀 시켜야 하는데 말이야. 공장장이 학교 보내지 마라고 하게 되죠. 그래도 매주 토요일 되면 ‘과장님 조퇴 좀 시켜주세요’ 하고 안 해주면 월담을 하는 거죠. 그렇게 다음 주 월요일 시말서 쓰고…. 저는 한 40장쯤 썼을 거예요.”
(204쪽, 공장 불이 꺼지면 독서등이 켜지고)
“‘집들이 선물 받은 화장지를 다 쓰면 떠난다’고 농담할 정도로 이사를 자주 했는데, 첫 입주 2년 뒤 17평으로 옮길 때만큼 감동적이었던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누가 저길 들어가나’ 하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형편 어려운 사람 처지에서는 반송아파트 말고 딱히 갈 곳도 없었죠. 타지에서 창원에 와 정착한 사람 중 절반은 다 반송아파트를 거쳐 갔다고 봐도 될 겁니다.”
(209쪽, 10평 공간, 내 집 마련의 꿈)
이주단지로 쫓겨간 창원 원주민들과의 이질성은 더욱 짙어졌다. 생업을 잃고 기술도 없었던 원주민 대부분은 아파트가 늘어나도 겨우 지어 올린 이주단지 주택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용도 제한으로 묶여 상업 활동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들이 떠올리는 창원공단, 그리고 신도시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성이었다.
(213쪽, 아파트 밖 원주민의 기억)
“아주머니께 ‘이번 주 8명’이라고 말씀드리면 동경전자·동경실리콘·한국TC전자 등 회사 작업반장 전화번호를 주거든요. 그러면 대표들끼리 말을 맞춰서 지금 양덕파출소 옆에 있던 삼일다방, 금강다방에서 다 같이 놀고 그랬죠. 휴일에는 밀양 삼랑진 낙동강변 나들이도 갔고, 멀리는 하동 송림 같은 곳으로 1박 2일 단체여행도 떠났습니다.”
(221쪽, 분식집 아주머니가 양쪽 연결)
‘창원공단의 기억’을 묻어두거나 추억거리로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의 기록으로 승화한 문학가들이 있었다. 공단 조성과 발전 과정에서 겪은 개인적이고도 특별한 경험들은 문학의 형태로 방출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들이었다. 원주민·기능공들의 기억이 풍화하는 동안에도 이들의 노력은 역사로 남았다.
(228쪽, 다시 묻는 ‘산단은 무엇인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벌써 남겼어야 할 공공의 기억
창원공단 50년 만에 기록하다
창원공단이 설립된 지 내년이면 만 50년이 된다. 창원공단은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끌고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는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물론 영세기업에 이르기까지 숱한 기업들이 무대에 올라 저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을 펼쳤다.
국가 시책 차원에서 만들어진 창원공단은 말 그대로 깡촌이었던 원(原) 창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로, 경남에서 으뜸가는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지렛대 구실을 했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창원으로 와서 크고작은 기업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공업계 고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한 젊은이들이었다. 창원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청춘을 보내고 새로운 삶을 일구어 새로운 창원을 만들어가는 한편으로 창원 사람이 되어 갔다.
이렇게 창원공단이 우뚝 서고 개별 공장들이 젊은 노동자들로 채워져 갈 때 그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창원에 터 잡고 살면서 농사를 짓거나 어로 활동을 해오다가 공단 설립과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원주민이 바로 그들이다.
그동안 기록되어 온 것은 창원공단의 역사였다. 무슨 기업이 들어섰고 어떤 물건을 만들고 원청과 하청의 관계가 어떠하고 연관산업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고용된 인원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 수치와 도표 또는 통계로 정리되는 역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창원공단과 더불어 울고 웃었던 이들의 사람 이야기는 배제된 역사였다.
5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공단이 만들어질 때 풋풋한 노동자로 공장에 들어섰던 이들은 대부분 70대에 턱걸이를 하고 있다. 집과 논밭을 내어주고 이주했던 원주민들은 그 노동자들보다 연배가 높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로 갈무리할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창원공단으로 말미암아 뿌리뽑힌 원주민들과 그 덕분에 뿌리내린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활자로 담았다. 그동안 누구도 하지 않았던 작업이었으므로 사상 최초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백지로 비어 있던 부분을 채워 창원공단의 역사가 좀더 입체적으로 구성될 수 있게 되었다. 무미건조한 역사에 생생하게 실감되는 내용을 조금이나마 더하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이 앞으로 좀더 다채롭고 풍부한 서사를 찾아내는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제어 : 창원, 마산, 창원공단, 산업화, 원주민, 농경, 이주, 이주민, 기능공, 노동자, 공존, 정착
분류: 한국사, 지역사
'피플파워가 낸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글세대를 위한 함안 금라전신록 산책> (1) | 2023.12.15 |
---|---|
<가야로 가야지> 쉽고 재밌는 가야역사 (1) | 2023.12.15 |
<캐나다에 살아보니 한국이 잘 보이네> (2) | 2023.05.17 |
<K-사이언스테크노미, 혁신 없이 미래 없다> (0) | 2023.05.17 |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 (1) | 2023.05.17 |
펴낸 날 : 2022년 11월 10일
가격 : 15,000원
반양장본 | 247쪽 | 152×225mm
ISBN 979-11-86351-53-6 0391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www.idomin.com
저자 : 전점석
jjseuk@hanmail.net
책 소개
‘가고파’의 시인은 진정 무엇을 추구했을까?
친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보이는
노산 이은상의 이중성은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수준…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했던 노산의 작품이 기교에만 능하고 진실을 외면한 글이 아니길 바라면서 마산에 있는 「가고파」 시비 순례를 시작했다.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이은상 인물 탐구는 흥미진진하였다. 그를 통하여 김성숙, 정인보, 이윤재, 안확, 최남선, 이광수, 조지훈, 안기영, 현제명, 홍난파, 김동진, 박태준, 윤이상 등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쓸 때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종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횡적으로 노산이 관계 맺은 인물들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았다. 노산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은 환산 이윤재이고, 해방 후의 어려운 시절에 감싸주신 분은 운암 김성숙이다. 이 두 분은 별도로 정리했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이선근, 윤치영과 각별한 관계였다. 이분들과는 체제 내에 적극 참여한 것은 같았으나 그 방식은 서로 달랐다. 일제강점기의 눈부신 활동에서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했으나 그들과도 다르다.
성장 과정과 학생 시절, 일본 유학 생활과 가족관계를 제외하고는 어지간히 살펴보았다. 집필은 충무공, 조선어학회, 친일문제, 국토순례, 대통령과의 관계, 시조, 비문, 노래 그리고 단체 활동 등 아홉 분야로 나누어서 작성했다. 해방 후에 초점을 맞추어 대통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책을 펴내는 이유는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친일과 항일을 구분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을 노산은 추구하였다. 그 해답을 다른 곳이 아니라 노산, 스스로에게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작품은 아름답고, 독재 부역은 사실이기 때문에 각각 떼어놓은 상태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과 독재 부역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훌륭한 시조시인이며 청년운동가인 노산이 독재 부역을 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책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너무 노산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분도 있을 거고, 지나치게 좋은 점을 강조한다는 분도 있을 수 있다. 글쓴이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모두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산의 이중성은 일반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좋은 건 좋다 하고, 나쁜 건 나쁘다고 한다는 원칙이다. 글쓰기는 가치판단과 감정을 가능한 자제하고 사실만을 나열하고자 했다. 이 책은 글쓴이의 독창적인 저서라기보다 기존의 연구 문헌에 의지하면서 노산이 저서를 통해 직접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아무쪼록 이 책이 문학, 문학인과 권력의 바람직한 관계를 생각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되기를 바란다. -서문에서
저자 소개
전점석
우산(愚山). 1951년 대구 출생. 31년간 몸담았던 YMCA를 퇴직한 후에 2011년 8월부터 경남일보 칼럼 「경일포럼」을 매월 게재하고 있으며 2018년 수필 「이름짓기」가 한국작가 제55회 신인작품상을 수상했다. 2020년 5월 뉴스통신진흥회가 주최한 제2회 탐사·심층·르포 취재물 공모에 「친일·반공·독재, 그 계보의 변신을 추적한다」가 가작으로 입선했다. 「인물추적 이은상」을 《피플파워》 2017년 12월호부터 2019년 12월호까지 2년간 게재했다.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을 《거창한들신문》에 2019년 6월 20일부터 6회, 제주4·3학살의 박진경 대령에 대해 《남해시대》에 2020년 5월 21일부터 3회 연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기억과 기록》 2019년 12월호에 「5·18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을, 광주전남작가회의의 《작가》 2020년 제26호에 「1980년의 광주 상무대와 대구 50사단 헌병대」를,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회보』 2020년 1월 통권 606호에 「80년대 신문을 오려 붙여서 복사하는 교회 청년들」을, 《샘》지 2020년 4월호에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를, 경남도민일보 2022년 2월 8일자에 「해안의용군과 해상인민군사건」을 게재했다. 2017년 8월 칼럼 분야 회원으로 경남작가회의에, 2019년 4월 한국작가회의에, 2019년 11월 진해문인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2020년 10월 10일 아름나라가 시행하는 세 번째 아름나라문화상, 2021년 경남민예총 공로상 받았다.
지은 책은 『일할 때도 주인, 일하고 나서도 주인』(1988년), 『진주에서 지역운동하기』(2002년), 『창원에서 지역운동하기 1, 2』(2011년), 『친환경 건축이 지구를 살린다』(2013년), 『지속가능한 지역사회』(2015년), 『진해근대문화유산의 재발견』(2018년). 엮은 책은 『인간답게 살자』(1985년), 『자유 상상의 나래를 펴라』(2017년).
목차
「가고파」에서 「새길론」까지 9
1. 「가고파」를 사랑하는 마산시민 15
마산 시내에 있는 「가고파」 시비를 찾아서 17
신중현과 베토벤은 음악만 할 줄 알았던 게 아니다 25
시의 거리에서 맑은 영혼을 담은 시를 만나고 싶다 27
2. 한국청년운동협의회 활동과 가고파시비보존결의대회 31
1962년, 첫 번째 휴전선 종주를 다녀와서 31
청우회 중앙본부 제2대~10대 회장으로 17년간 활동 35
반탁, 반공투쟁으로 8개 청년단체들이 모인 대한청년단 40
1963년, 10년 만에 청우회로 부활 44
「가고파」 시비 보존 결의대회의 후원단체인 건국회 46
3. 해방 직후 광양건준 부위원장, 호남신문 사장 49
이은상, 광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 49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최흥종 위원장, 전남인민위원회 박준규 위원장 52
미군정으로부터 호남신문 관리권을 받은 사장 박준규, 부사장 이은상 56
이은상 사장 취임 이후 친미 성향으로 돌아선 호남신문 59
4. 한독당 전남도당 위원장, 여순사건 김지회 신원보증 63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강사로 참여 64
여순사건과 한독당 계열의 오동기, 송욱, 이은상 66
여순사건 신원보증문제로 물러난 이은상의 서울, 부산 생활 71
6·25전쟁이 끝난 후 호남신문의 재건을 위해 노력 74
국립 전남대학교 후원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77
5. 이승만 단독정부 반대, 민주공화당 입당 거절한 운암 81
바위처럼 서 있는 운암 김성숙을 존경하는 노산 81
운암을 향한 추모시, 추도사와 묘비문, 묘비명도 작성한 노산 86
운암은 민주공화당 입당을 거절, 노산은 창당선언문을 작성 88
지조보다 중요한 노산의 ‘새길론’과 강력한 ‘지도자론’ 91
6. 이승만 대통령 후보 지지와 4·19학생혁명기념탑 비문 93
이순신 같은 분이라고 이승만 대통령 후보 지지 유세 94
조지훈의 지조론과 천관우의 노산에 대한 실망 98
4·19정신을 계승했다는 박정희 장군에 의해 기념탑 건립 103
피 끓는 젊은이를 노래한 노산의 「학생의 노래」 106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노산이 쓴 조사를 대독 108
7. 이승만 대통령, 김구 주석과 노산 이은상 111
시조 「목이 그만 멘다」와 헌수송 「송가(頌歌)」 113
계속 대통령 하려고 사사오입 개헌한 이승만을 찬양 117
백범 조가(弔歌) 1949년, 백범 추모시조 1950년 119
3·15를 불상사라고 한 노산 121
8. 「피어린 六百里」, 1962년 첫 번째 휴전선 종주 125
휴전선이 국경선으로 굳어져 가는 600리 128
휴전선을 다녀온 후 청년운동에 앞장서다 134
노산이 생각하는 분단의 원인과 분단극복 방안 136
9. 『기원』, 1980년 두 번째 휴전선 종주 143
평화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반공청년운동에 매진 145
굳어져 가는 휴전선을 찾은 두 번째 종주 146
이승만 시절 평화통일은 위험한 용공사상 147
평화통일을 말할 수 없던 시절의 북진통일 149
10.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현충사를 성역화 153
노산은 충무공기념사업회 1955~61년, 1972~82년 회장 153
현충사는 성역화, 탄신일은 국가기념일 157
박정희 역사관은 식민사관에서 이순신의 신격화로 161
박정희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해놓은 인물 166
11. 신사임당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169
사임당과 율곡의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렸다 170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171
무려 6판을 거듭한 『사임당과 율곡』 173
12. 영남대학교 설립은 이은상과 이후락의 작품 177
무리한 시설투자로 경영난에 봉착한 청구대학 177
조윤제는 학교문제를 정치권력에게 가져갔다고 힐책 179
같은 날, 각 이사회가 합병을 결의하고, 합동이사회 열어 최종 의결 181
영남대 교가는 이은상과 김동진의 작품 185
13. 대통령의 입각 권유를 거부한 사람들 189
3선 개헌을 앞둔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 작업에도 참여 189
입각 권유를 거부한 게 유신시대에 저항(?) 194
앞장서서 유신과 유신정권을 찬양한 노산과 문인들 196
1인 독재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어둠을 밝힌 문인들 198
한글전용정책 수립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활동 200
14. 비통한 심정으로 쓴 박정희 대통령 묘비문 205
비통함과 존경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 비문과 조가 205
30년 친구 박정희를 위한 시인 구상의 진혼시 209
똑같이 충무공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212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초안 작성 215
노산이 선택한 언론, 교육, 문화 국민운동 218
15.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 노산 223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경하하였다 223
이선근, 조병화, 서정주, 김춘수, 이병주, 천금성 225
불과 1년 5개월이었던 국정자문회의 위원 229
16. 1947년 대도론과 1961년 새길론 235
노산이 노래하지 않은 강과 산이 없을 정도 235
노산은 『대도론』에서 좌우익의 폭력을 염려했다 238
친일과 항일을 구별하지 말자는 노산의 『새길론』 240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웠다는 『새길론』 243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서는 독재자를 옹호하는 이중성 245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노산의 시비를 돝섬 이외는 모두 둘러보고서 느낀 점은 정말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노산 특히 「가고파」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2개를 제외하고 모두 노산이 돌아가신 후에 세워진 것이다. 만약 노산이 이렇게 많은 시비가 세워져 있다는 걸 아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분명 고마워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실 것 같다. 마산 시민들이 자신에게 과분한 사랑을 준다시며 불의에 저항한 3·15를 불상사라고 한 것을 이해해달라고 하실 것 같다.
(27쪽, 시의 거리에서 맑은 영혼을 담은 시를 만나고 싶다)
청우회는 박정희 정권의 반공정책을 지지하는 민간단체로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을 때마다 정권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산은 제2~10대 회장을 연임하면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7년간 활동하였다. 역대 16명의 회장 중에서 가장 오래 활동하였다. 1975년에는 단체 명칭을 한국청년운동협의회로 바꾸었으며 제1회 반공청년운동 순국자 합동추념제를 시작했다. 이후 건국청년운동협의회(1987년), 대한민국건국회(1995년)와 대한민국통일건국회(2017년)로 이름을 바꾸었다.
(45~46쪽, 1963년, 10년 만에 청우회로 부활)
광양자치위원회 구성을 협의하고, 위원장 김완근, 부위원장 이은상, 정진무를 선출했다. 노산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임원 세 사람이 승낙을 받기 위해 노산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상임위원 24명 중에서 친일파 몇 명을 교체하자는 등의 수정 제안 몇 가지를 한 뒤 쾌히 승낙하였다고 한다. 노산은 비록 지역민은 아니지만 전국적인 명망가였기 때문에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50쪽, 이은상, 광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
당시 서울에서는 이승만 정권 유지를 위한 반공이데올로기 담론의 형성에 문인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1948년 12월 27~28일 「민족정신 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름이 오른 경남, 부산지역 문화인은 이은상을 위시해서 김달진, 김춘수, 김용호, 김상옥, 김용환, 김의환, 유치환, 유치진, 조연현, 최현배, 최인욱, 오종식, 정인섭, 손진태, 이광래, 이정호, 최영해, 오영수, 탁소성, 한형석, 허영균, 설창수 등이었다.
(72쪽, 여순사건 신원보증문제로 물러난 이은상의 서울, 부산 생활)
일제강점의 암흑기에 ‘달걀로 바위 치기보다 더 가망 없는 싸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떨쳐나섰다는 것을, 그들이 이름 없고, 빛나지도 않으면서 굶어 죽고, 맞아 죽어 가면서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운암을 보면서 노산은 절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87쪽, 운암을 향한 추모시, 추도사와 묘비문, 묘비명도 작성한 노산)
판문점에서 벽제관에 이르는 지역에 관한 부분에서 냉전의식을 확실히 볼 수 있다.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배하여 도로 송도로 퇴각하는데 이때 조선의 이덕형이 진군을 주장했다는 내용은 맥아더의 북진론을 지지한 것이다. 벽제관에 관한 글에서 세 개의 다른 역사적 사례를 비교·소개하면서 맥아더의 북진론을 영웅적인 것으로 신화화했다.
(131쪽, 휴전선이 국경선으로 굳어져 가는 600리)
노산은 『기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평화’라고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평화는 전쟁 없는 평화가 아니었다. ‘총칼이 아름다운 강산을 더럽힌다’는 표현으로 인해 노산이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것 같지만 그가 참여한 청년단체와 청년들에게 행한 연설을 보면 기본적으로 멸공과 북진통일을 이루어야만이 찾아오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145쪽, 평화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반공청년운동에 매진)
노산은 『사임당과 율곡』에서 사임당에 대해서는 효녀, 착한 아내, 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으며, 율곡에 대해서는 지방관이 되어 지방행정을 쇄신하는 모습을 그렸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국모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논리에 합당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정치적 목적이고, 노산은 민족문화 측면이라고 나누어 볼 수도 있다.
(174~175쪽, 무려 6판을 거듭한 『사임당과 율곡』)
박정희 대통령은 이 충무공에 대해 남다른 존경심을 갖고 있던 노산을 찾게 되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밀해졌다. 노산은 평소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212~213쪽, 똑같이 충무공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77세의 노산은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제목과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상’이라는 부제로 글을 썼다. 직책은 민족문화협회 회장이었다. ‘10·26사태 이후 두어 차례나 위급한 고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앞에는 안팎으로 닥쳐오는 난관이 겹겹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모든 여론들이 한결같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223~224쪽,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경하하였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문제적 문인 이은상을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책
뛰어난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은 언제나 논란이 따라다니는 문제적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시인임을 앞세우며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아무 잘못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승만에서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권력의 편에 서서 독재를 옹호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그의 문필 활동까지 지배자를 위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논의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은상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저마다 자기 관점에 맞추어 관련 사실에 대해 해석하면서 자기 얘기만 되풀이하고 마는 것이다.
지역에서 지역운동을 오랫동안 벌여온 전점석 작가의 <노산 이은상과 대통령>은 상반된 주장을 아우르는 한편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노산의 생애 전반을 빠짐없이 폭넓게 살펴봄으로서 그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에 이르고 있다.
해방 직후 전남 광양에 머물던 때부터 광주에서 신문사 사장을 하던 시절의 행적, 여순사건에서 보인 그의 태도는 널리 알려진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6.25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그의 정신세계와 이후 반공청년단체 회장 시절의 사상은 새로운 사실로 다가온다.
세종대왕 숭모 활동과 한글전용정책, 이순신 장군 영웅화와 아산 현충사 성역화 사업, 이율곡과 그 어머니 신사임당 선양 사업에 나선 행적도 크게 알려진 것은 아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새롭다. 전문 연구자들은 아는 일이라 해도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그렇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이은상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동시에 독재를 찬양했다. 어떤 사람들은 노산을 두고 소신도 줏대도 없이 자기 이해와 편의를 좇는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점석 작가에 따르면 이은상은 그런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노산 이은상의 이중성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이중성이 노산의 정신세계에서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아무 모순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공과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았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자라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노산 이은상을 비판하든 옹호하든, 전문 연구자이든 일반 애호가이든 그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고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 번 읽어 보시라고 권할 만한 책이다.
주제어: 지역, 마산, 가고파, 문화, 김성숙, 정인보, 이윤재, 안확, 최남선, 이광수, 현재명, 홍난파, 김동진, 박태준, 친일, 독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순신, 3.15, 4.19,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율곡, 휴전선
분류: 역사, 지역, 문학, 정치
제목 명곡의 탄생
펴낸날 2018년 11월 16일
가격 13,000원
양장본 | 280쪽 | 145*210mm
ISBN 979-11-86351-20-8 (0367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편저 고굉무·이정국
책 소개
<명곡의 탄생>은 마산 창동에 있는 LP카페 ‘해거름’의 카페지기인 고굉무·이정국 씨가 함께 엮은 음악 이야기다.
카페에 찾는 손님들에게 신청 받은 노래들을 들려주며 그 노래의 숨은 이야기를 함께 전했다.
단순히 노래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노래에 얽혀 있는 배경이나 사연을 설명함으로써 더 깊은 이해를 돕는다.
익숙한 멜로디, 가사라도 그 멜로디와 가사가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또 색다르다.
이제는 추억이 된 옛 노래들. 그 노래와 작사가, 가수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또 다른 깊이가 있다.
편저
고굉무
음악카페 해거름 2대 지킴이로 있다.
음악을 통해 많은 이와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과 사연, 숨은 이야기로 음악을 감상하는 많은 사람에게 조금의 보탬이 되고자 이 글을 엮었다.
이정국
해거름 추억 지킴이. 1985년 여름, 군 입대를 위해 휴학 중 6개월간 해거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인연으로 35년을 드나들고 있다. 공교롭게도 2018년 작은아들이 군 제대 후 해거름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해거름은 창동에서 40년을 버티고 있다. 또 30년 후에는 어떨지.
목차
01
안개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노래
정훈희의 꽃밭에서
02
불꽃처럼 7년을 노래하다
정미조의 개여울
03
70년대 추억과 낭만을 담은 여름명곡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
04
세상의 슬픔과 한을 노래한 제망매가
교사 박기동·안성현이 만든 부용산
05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리메이크된 노래
무명가수 김해일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
06
시월의 마지막 밤은 원래 9월이었다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
07
정지용의 시가 국민가요로 불리기까지
이동원·박인수가 부른 향수
08
향수에 젖은 기억의 노래
임종수의 고향역
09
헤어진 첫사랑을 다시 맺어준 노래
윤연선이 부른 얼굴
10
부정한 권력에 맞선 열사의 노래
손인호의 남원 땅에 잠들었네
11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
손로원이 만든 봄날은 간다
12
고통의 극한에서 노래한 문화 빨치산 시인 이야기
한하운의 시로 만든 보리피리
13
고립된 5·18광주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
김원중이 부른 바위섬
14
또 다른 재킷이 존재하는 0집 앨범
이정선의 섬 소년
15
가슴에 묻어버린 미완의 연주곡
부활의 별
16
다시 태어난 독립군의 노래
작곡가 이시우가 만든 눈물 젖은 두만강
17
오빠 대신 처형당한 열아홉 처녀의 노래
금지곡이 된 산동애가
18
영혼의 노래를 부른 불멸의 가객 - 1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
19
영혼의 노래를 부르는 불멸의 가객 - 2
김정호의 님
20
명동 샹송으로 불리어진 시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21
대중문화의 흐름을 바꾼 전설의 디바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
22
한국 록의 산증인이자 한국적 록의 완성자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23
한국에서 최초로 ‘디바’라는 수식어를 얻은 가수
패티김의 이별
24
빛바랜 첫사랑의 추억
방주연의 생각해 보세요
25
노래로 부른 연애일기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26
45년 만에 팬들이 돌려준 잃어버린 음반
방의경의 내 노래 모음
27
인고의 세월을 초월한 최고의 명곡
이영훈의 슬픈 사랑의 노래
28
사랑으로 승화시킨 평화의 노래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넬라 판타지아
29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캐럴
요제프 모어 신부가 만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30
그리움과 슬픔을 달래는 마음의 노래
포스터가 만든 스와니강
31
한 남자의 운명을 바꾼 노래
잭슨 브라운의 The Load-Out&Stay
32
시간을 창조하는 노래
짐 크로스가 부른 Time In a Bottle
33
체로키 인디언의 비극적 삶을 한 맺힌 눈물로 노래하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인디언 보호구역
34
연인을 기다리는 노래가 민중가요로 불리게 된 배경
미키스 데오도라키스가 만든 기차는 8시에 떠나네
35
유대인 대량학살을 비유한 슬프고도 아름다운노래
존 바에즈가 부른 Donna Donna
36
한국 중년 남자의 눈물을 글썽이게 한 노래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
책 속으로
우리 토박이말을 잘 살려 쓴 가사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 해맑은 정훈희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더욱 정감이 가는 아름다운 노래 ‘꽃밭에서’는 불후의 명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를 둘러싼 이색 주장이 있어 흥미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종택 작사가의 작품이 아니라 세종과 세조 때까지 관직을 지낸 최한경의 한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 (본문 16쪽, 정훈희의 꽃밭에서)
가왕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란 노래는 원곡이 아니라 리메이크된 노래다? 그토록 대중들에게 빅히트를 치고 많이 불려 졌던 유명한 곡이라면 원곡을 부른 가수에 대한 얘깃거리도 있을 법하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묻혀 있다가 최근에 비로소 알려진 사실은 놀랍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러니했다. 그러면 원곡을 부른 가수는 누구일까?
- (본문 40쪽, 무명가수 김해일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
가수 김정호라는 이름을 세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의 인기가 한창일 무렵, 김정호 음악의 결정체라 평가받는 ‘하얀 나비’를 발표하면서 또 한번의 이목을 끌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국악의 끼가 묻어나는 곡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본문 141쪽, 김정호의 님)
이영훈, 그를 말할 때 이문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이문세의 관계를 떠나서,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대중 가요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이문세가 뛰어난 재능을 지닌 가수이지만, 그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아마도 좋은 작곡가를 선택했던 안목이었을 것이다.
- (본문 216쪽, 이영훈의 슬픈 사랑의 노래)
두 대의 기타만으로 연주되는 ‘Time In a Bottle’은 오케스트라 연주에 비견할 정도로 찬사를 받은 곡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기타를 좀 친다는 말을 들으려면 반드시 연주해봐야 하는 대표곡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 (본문 246쪽, 짐 크로스가 부른 Time In a Bottle)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카펜터스의 인기는 연이은 후속곡 ‘Top Of The World’로 두 번째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블 레츠의 곡을 리메이크한 ‘Please Mr. Postman’을 불러 세 번째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 기록도 세우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카펜터스가 활동하는 동안 빌보드 싱글차트에 세곡을 1위에 올렸고, 같은 차트에서 모두 10곡이 Top10에 기록했으며 15곡을 어덜트 컨템퍼러리 차트 1위에 올렸다.
- (본문 278쪽,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명곡의 탄생>은 마산 창동에 있는 LP카페 ‘해거름’의 카페지기인 고굉무·이정국 씨가 함께 엮은 음악 이야기다.
카페에 찾는 손님들에게 신청 받은 노래들을 들려주며 그 노래의 숨은 이야기를 함께 전했다.
노래와 얽혀 있는, 때로는 애달프고 때로는 서정적인 이야기들.
그냥 들었을 때는 흘러 지나가는 멜로디와 가사도, 그 노래의 숨은 이야기를 알고 나면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곤 한다.
이제는 추억이 된 향수 어린 옛 노래들.
해거름지기가 추천하는 명곡 36곡 보고 들어보자.
추천사 중
<명곡의 탄생>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40년 전통의 ‘해거름’ 카페지기로 오랫동안 지역민들로부터 사랑받아온 고굉무, 이정국 씨가 펴낸 음악 이야기이기에 기쁜 마음이 더합니다.
<명곡의 탄생>은 경남도민일보가 발행하는 월간지 <피플파워>에 연재된 이야기를 묶은 것입니다. 드문드문 이런 류의 책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아마추어 음악애호가가 열정을 기울여 명곡이 탄생한 과정을 더듬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책에 실린 노래들은 대부분 카페 <해거름>에서 즐겨 듣는 곡들입니다. 익숙하기에 그 탄생을 풀어놓은 이야기가 더 정겹고, 그렇기에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할 듯합니다.
연재에 이어 책이 완성될 때까지 저자들이 기울인 땀과 노력을 기억합니다. 단순히 음악을 즐기는 것만으로는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없습니다. 마산의 명소로 자리 잡은 ‘해거름’ 카페지기라는 책임감이 두 저자를 ‘발분(發奮)’ 시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명곡의 탄생>은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음악과 추억을 공유하면서 그런 일상을 견디는 이들에게 유용한 읽을거리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즐거운 음악 여행에 나선다 생각하고 다들 일독해보시길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 구주모 경남도민일보 사장
주제어: 음악, 명곡, 대중가요, 해거름, 마산, 창동
분류: 음악일반/교양
'피플파워가 낸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흔들리는 청춘에게 전하는 메세지 <보다 약게 사는 기술> (0) | 2019.06.18 |
---|---|
걸으며, 쉬며, 사색하는 경남 힐링 둘레길 38선 <경남을 걷다> (0) | 2019.03.20 |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술! <굿데이뮤지엄과 함께 하는 세계의 술 3000> (0) | 2018.08.21 |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여정 <백두현의 선택> (0) | 2018.03.11 |
이야기가 있는 느린 풍경 남해바래길 (0) | 2017.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