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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 3

Date : 2020. 11. 23. 15:02 Category : 피플파워가 낸 책 Writer : 쏭이얌

 

 

 

제목 80년대 경남 독재와 맞선 사람들

펴낸날 20201120

가격 15,000

반양장본 | 280| 145*210mm

ISBN 979-11-86351-31-4 (0391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지은이 김주완

 

 

 

 

책 소개

87년 경남에서 벌어진 항쟁은 전국적으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국제축구경기가 중단되는 과정이 생중계로 통해 전국에 방송된 마산의 6·10시위와 남해고속도로 점거 및 LPG차량 탈취 시위로 전국에 혁명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진주 6·17시위는 6월항쟁의 열기를 가열·확산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후 서울의 시각에서 씌어진 6월항쟁 기록물들은 이 두 가지 시위에 대해 하나의 에피소드이외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지역의 관점에서 지역사람들이 6월항쟁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은 80년대 경남의 각 부문별 민주화운동과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단체의 억압과 저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경남의 기록이긴 하지만, 서울 이외에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 될 것이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주완

1990년 기자 노릇을 시작해 31년째 이러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출판미디어국장, 전무이사를 했고 블로그와 유튜브도 운영 중이다.

<토호세력의 뿌리>,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 인생>, <풍운아 채현국>, <별난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 등 책을 썼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80년 짧았던 민주화의 봄

짧았던 민주화의 봄

마산 이어 진주의 남강도하작전

5·175·18로 짓밟힌 꿈

노동자들도 나섰지만

 

2| 80~83년 대학가의 암중모색

70년대와 80년대의 만남

대학가 학습소모임들의 물밑 모색

지도휴학·강제징집·제적

반정부 유인물 살포사건

 

3| 80년대 중반 농민·문화운동 결합

농민운동의 태동

가톨릭농민회의 투쟁

농민운동과 문화운동의 결합

한국 농민운동의 산 증인 정현찬 씨

 

4| 84년 학원자율화 투쟁

대학에 상주하던 사복경찰들

제적생 복교와 학원자율화 투쟁

총학생회 부활, 결국 85년으로

 

5| 85년 총학생회 부활과 학생운동

 

6| 87년 이전의 노동운동

일본인들에게 점령된 마산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만남

현장에서 단련된 학출노출

문성현과 이석행 운명의 만남

 

7| 87년 이전의 지역 재야운동

허진수 씨, 부마항쟁 세대로 6월항쟁에도 참여

 

8| 87년 이전의 교육·여성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대학교수의 시국선언

여성운동

학생운동권 출신 조창래 교사

82Y중등교육자협 김용택 교사

 

9| ‘아부저항으로 갈라진 문인들

문학운동

마당극 운동

대안언론 운동

 

10| 항쟁의 시작, 86년 투쟁

막 올린 민주헌법 쟁취투쟁

경남 4개 대학 연합 시위

공개 투쟁조직의 출범

겨울방학에도 계속된 투쟁

창원대 지하 운동권조재석씨

 

11| 박종철의 죽음과 2·7국민추모회

2·7 국민추도회로 항쟁 점화

지역언론의 눈물겨운 정권 옹호

 

12| 873월에서 4·13까지

873·4월의 언론보도

마산·창원·진주, 그리고 거창에서

진주 대아고 학생들의 고교민주화 투쟁

 

13| ‘4·13호헌후 지역유지들은 뭘 했을까

항쟁 불타오르는데 꽃씨 뿌리기 행사?

반상회 열어 호헌조치 정당화 안간힘

총장들, 교수 시국선언 탄압 혈안

문인들 권력 아부성 결의문 채택

가든파티에다 룸살롱 폭탄주 파티까지

 

14| 6월 항쟁의 전운

줄 잇는 4·13호헌 규탄 집회

정권과 학교당국의 결탁

천주교 신부와 수녀들의 투쟁

학교당국의 또 다른 꼼수

 

15| 신부 목사 약사 교수 교사 문화인들의 참여

기독교 목사들 삭발·단식

약사와 대학교수·교사·문화인도 동참

 

16| “6·10 대회를 막아라

6월초 경남국본결성

문교부의 치졸한 시위 저지 전략

내무·법무장관의 대국민 협박

대회 저지에 민간인까지 동원

 

17| 6·10 대회 막이 오르다

도내 각 대학 사전집회

진주·진해·거창에서도 독자 집회

아침부터 진해 6·10 시가행진이 벌어진 까닭

 

18| 6·10 대회의 주요 타격대상은?

국제축구경기 중단, 국내외 관심

알아서 기는 지역신문 보도

독재에 빌붙은 기관 집중 타격

 

19| 4·19 이후 진주 최대 시위항쟁 재점화

공무원 6명이 농민 1명 감시

항쟁의 거점, 마산에서 진주로

4·19 이후 최대의 시위

진주시내는 해방구

 

20| 경찰 과잉진압이 부른 고속도로 점거

경남대 유장근 교수도 경찰에 연행

창원전문대생도 학내문제로 농성

15일 진주 시위에 놀란 경찰

사상 초유 고속도로 점거 시위

 

21| 세계를 놀라게 한 고속도로 가스차 탈취 시위

태도 달라지기 시작한 경남신문

경상대생의 가스차 탈취

마산·창원도 산발 시위 계속

전국 놀라게 한 가스차 탈취 충격

 

22| LPG가스차 위에서 횃불 들고 "죽자! 죽자!"

러닝셔츠로 횃불 만들어

경찰의 기습작전 배경은

전국 시위 격화 계기 제공

진주교대에서도 시위

 

23| ‘군부 개입설긴장 속 6·26 총궐기 임박

진주교대·인제대·마산간전도 시위 동참

6·26 총궐기를 준비하다 전국 시위 격화 계기 제공

군부 개입 가능성 보도 눈길

 

24| 경남의 6·26 대행진

마산 2, 진주 2만 거리 장악

진해·김해·거창에서도

경찰이 깡패들에게 얻어맞은 사연

 

25| 6·29선언 그 후

6·29 항복선언 직전 경찰의 폭력

이후에도 계속된 경찰의 폭력 진압

지역언론 민주화에 대한 열망

 

등장인물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한창이던 1982, 매서운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겨울 언덕에 서서민주화의 싹을 틔우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부마항쟁 세대였던 주대환, 박진해, 서익진, 박영주, 이태수 등이 만든 <마산문화>가 그것이다. 1980년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이어진 광주학살, 816만 명 이상을 체포, 감금했던 삼청교육대 지옥훈련 등으로 온 사회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이었다.

82년 말 발간된 부정기간행물 <마산문화> 1겨울 언덕에 서서80년대 최초의 노동소설 수출자유지역의 하루최순임, 본명은 주식회사 삼미의 고경엽, 비판적 시인 이선관의 시세계를 소개한 이선관 시론박진해, 문화운동의 현황을 짚은 마산 동신제와 지신밟기박진해, ‘마산연극의 흐름박영주, ‘마산의 청년문학 동인활동이재업, 그리고 민족·민주주의·민족해방운동서익진, ‘알제리 민족해방전쟁김종철, ‘니카라구아에서의 해방전쟁번역물 등 당시로선 불온하고도 위험한 글들이 실려 있다.

(2| 80~83년 대학가의 암중모색34)

 

 

 

송기원이라는 소설가 선배를 잘못 만난 탓이지요. 75년 중앙대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그 선배가 시키는 대로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집회현장에서 읽었다가 경찰에 잡혀갔지요.”

거창 갈릴리교회 유성일 목사는 거창YMCA 출신인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과 함께 70·80년대 거창지역 농민운동과 각종 사회운동의 산파이자 핵심이었고, 또한 거점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와 관련,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고 한신대로 진로를 바꿔 신학을 공부한 후 80년 정찬용 씨와 인연으로 거창에 정착하게 됐다.

그는 표만수·정쌍은 등 농민운동 핵심인물들과 함께 농민회를 만들고 지역운동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농촌지역으로는 드물게 876월항쟁 시위를 주도했다.

86년 갈릴리교회를 설립한 후 어린이집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지역최초로 탁아운동을 시작했으며, 20197월 작고했다.

(3| 80년대 중반 농민·문화운동 결합 48)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이라는 시다. 3·15마산의거 직후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추모시 <베고니아 꽃잎처럼이나>를 발표하기도 했던 김춘수였지만, 전두환 독재의 총칼 앞에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통영 출신으로 통영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마산의 민족자산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일당과 함께 민정당 창당발기인 15명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그 덕에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9| ‘아부저항으로 갈라진 문인들 103)

 

 

 

15일 자 사회면은 개헌논의 빙자 불법행동 엄단, 김 법무 지시 전국 공안검사 비상근무체제 돌입, 중범자엔 법정최고형 구형이란 기사가 나왔는데, 그 옆에는 봄맞이 대청소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실려 있다. 비상한 시국에 비해 참으로 한가롭게 여겨지는 풍경이었다.

17일 사회면에 보도된 꽃씨 뿌리기 시범행사도 그랬다.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조익래를 비롯한 도단위 기관장과 도청·창원시청 직원 550여 명이 창원시청과 중앙로터리변에서 백일홍과 맨드라미·봉선화 등 꽃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았다는 기사였다.

22일에는 급진좌경 의식화 오염방지 주력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사 옆에 <경남신문> 박정명 사장이 진해 이충무공호국정신선양회회장 이상인로부터 진해군항제 행사에 대한 협조와 성원에 감사하는 표시로 감사패를 받았다는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다.

(13| ‘4·13호헌후 지역유지들은 뭘 했을까 151~152)

 

 

 

하지만 진주와 진해, 그리고 거창에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소규모 집회가 열렸다. 진주의 경우 경상대 학생들과 별도로 통일민주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농성과 집회를 열었던 것이다.

다음은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경남신문 기자의 메모이다.

진주시 통일민주당 경남 제3지구당 당사에서 국민 합의 반대하는 호헌 철폐, 행동하는 국민 앞에 박종철은 부활한다는 유인물 살포와 함께 상오 1040분께 옥외방송이 시작됐고, 하오 240분께 경찰 병력이 투입돼 일부 당원이 연행됐으며, 그 주변은 삼엄한 경찰의 경비가 펼쳐졌다. 하오 330분께 경찰은 당사 옥외스피커를 철거하고 연행당원을 훈방시켰다.”

이 메모는 진해 상황에 대해서도 오전 11시 여좌동 여좌성당 허성학 신부와 신도 50여 명이 ‘4·13조치 철회하라는 내용의 피킷을 들고 시내를 거쳐 성당에 입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17| 6·10 대회 막이 오르다 187~188)

 

 

 

마침내 15일이 밝았다. 이날은 4·19혁명 이후 진주에서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날이었다. 80년 봄 남강 도하 작전때도 대규모 거리시위가 있었지만, 그땐 시민들과 결합하지 못한 학생들만의 저항으로 끝났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미리 계획된 대로 아침 9시부터 각 단과대별로 집결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3000~5000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수업과 기말고사를 전면거부하고 시내 진출을 시작했다. 대형 태극기를 든 공대생을 선두로 정문과 후문을 돌파한 학생들은 오전 1130분쯤 새벼리와 대동중공업을 지나 구호를 외치며 진주역 사거리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1000여 명이 약식집회를 마치고 시내로 진입할 무렵에는 이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군중이 불어나 있었다.

(19| 4·19 이후 진주 최대 시위항쟁 재점화 213)

 

 

 

17일 경상대생들의 두 번째 고속도로 점거와 LPG 운반트럭 탈취사건은 다음날 대부분의 전국언론에 머리기사로 보도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상황 판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경찰 간부 장충남 씨(현 남해군수)“15일 진주시위 이후 16·17일에는 진주에 가장 많은 경찰이 배치됐다. 울산에 있던 경찰력도 왔는데, 모두 8개 중대쯤 되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 경찰관은 그런 상황에서 17LPG 차량 탈취사건이 일어났으니 난리가 났다.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걸려와 상황을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석간인 <경남신문>에 앞서 서울지역 신문들은 조간에서부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1면 톱으로 남해고속도 3시간 장악 - 경상대생들 마~진 열차도 한때 막아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사회면에도 지방시위 갈수록 격렬-진주 LP 가스차 2대 폭파 위협기사와 사진을 톱으로 올렸다.

(21| 세계를 놀라게 한 고속도로 가스차 탈취 시위 236)

 

 

 

오후 725분 구경꾼들 용마공원(200), 제비산(150), 로얄호텔(50), 인근 빌딩 옥상 등에 분산 관망 중. ‘’ ‘민심은 떠났다’ ‘최루탄 쏘지마라’.”

오후 935, 월남다리 옆 명성예식장 부근서 사복경찰에 연행 중이던 학생 2명 시민들이 탈취, 전경과 시민 시비 소란.”

오후 10, 코아 앞 시위대 경찰 최루탄 발사로 해산. 창동 일대 시위대가 거의 점거. 규모 15. 학생보다 시민 수 많다.”

오후 1110, 양덕, 산호1, 회원 등 파출소 노인 동원 음주 파티 벌여 투석 막고 있다.”

위의 인용문들은 87626일 경남신문 취재기자들의 전화 보고를 시간대별로 메모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렇듯 이미 민심은 독재정권을 떠난 듯 했다. 학생이 연행되면 시민이 달려들어 구출했고, 시위대 중 학생보다 시민의 수가 많았다. 경찰도 시위대를 진압할 힘을 잃었다. 시위대의 투석을 막기 위해 노인들을 파출소에 불러 음주파티를 열어주는 웃지 못할 상황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소극적인 보도태도를 보여온 <경남신문>도 이날 시위에 대해서는 다음날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로 비교적 상세히 시위 소식을 전했다.

(24| 경남의 6·26 대행진 257)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김태리 하정우 강동원 등이 출연한 영화 <1987>이 개봉되면서 많은 사람, 특히 1987년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2016~2017 촛불혁명이 80년대의 폭압적인 대국민 감시체제 하에서도 독재권력에 저항해온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대의 한 부분적 단면을 보여줄 뿐 전체를 담지 못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전국 몇몇 대도시에서도 항쟁이 있었다는 것을 몇 개의 사진으로 보여주지만,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상황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6월항쟁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맞지만, 자칫 영화만 보면 그것만이 항쟁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착각할 우려도 있다.

이 책은 서울이 아닌 경남지역에서 1980년대 독재에 저항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책은 또한 1987년 유월항쟁 뿐 아니라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박정희의 사망, 전두환의 등장과 권력 찬탈, 19805월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학생과 시민 등 각 부문별 저항이 어떻게 조직되고 발전해왔는지를 살피고 있다.

특히 경남은 당시 부산과 더불어 1987614일 서울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되면서 소강상태였던 시위에 기름을 붓는 15~18일 시위로 전국에 충격을 줬다. 이는 전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워싱턴포스트> 등 외신에도 크게 보되었다. 이후 전국의 시위가 더 확산되었음은 물론이다.

 

 

 

 

 

 

 

 

주제어: 민주화운동, 6월항쟁, 경남6월항쟁, 부마민주항쟁, 군사독재

분류: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역사 > 테마로 보는 역사 > 혁명사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전두환정부/노태우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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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0. 6. 11. 14:35 Category : 피플파워가 낸 책 Writer : 쏭이얌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제목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펴낸날 2020620

가격 17,000

반양장본 | 302| 152*225mm

ISBN 979-11-86351-29-1(0309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엮은이 한국전쟁전후진주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

기록자 김주완 김한규 한양하 백은숙 박성경

 

 

책 소개

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히틀러와 나치의 유태인학살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작 대한민국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들어서야 비로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하고, 부분적으로 진실규명이 이뤄졌지만, 아직도 많은 미신청인들이 남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이미 70대가 된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원 학살의 실상과 유족들의 아픈 삶을 기록했다.

 

 

 

저자 소개

*진주유족회 증언록편찬위원회

위원장 정연조

위원 김현국 이증식 정영우

       강병현 정효갑 김용호

       김승일 전영철 김상길

 

*진주유족회 증언채록팀

팀장 김주완

팀원 김한규 햔양하

       백은숙 박성경

 

 

 

목차

발간사

증언자 강병현

증언자 강성헌

증언자 김상길

증언자 김순달

증언자 김승일

증언자 김형자

증언자 문병근

증언자 박남숙

증언자 백자야

증언자 이주택

증언자 이증식

증언자 장호수

증언자 장호조

증언자 정병표

증언자 정연조

증언자 정영자

증언자 황양이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알게 된 나이는 몇 살 때인가요? 알고 난 뒤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아버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된 나이는 너댓 살쯤 됐을 거예요. 다른 집에는 아버지가 있는데 왜 난 없을까 생각했지. 엄마한테 물으면 애들은 알 것 없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은 혼자서는 안 풀리는 문제였던 거죠. 그리고 다른 집에는 논도 많이 있고, 산도 있고, 밭도 있고 가을 되면 곡식도 거두어들이는데, 왜 우리집은 아무것도 없을까.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였지.

근데 좀 크고 보니까, 큰집에서 우리가 분가할 때 아무것도 안 줬다는 걸 알게 되었지. 내가 어느 정도 커가지고 서울 갔다가 내려와서 큰아버지 큰어머니, 할머니께 분가할 때 우리 아버지 밑으로 논 두마지기 있었다는데 왜 안주시느냐, 주십시오, 이랬더니, 이제 자기들도 자식들 공부시키고 장가보내고 없다는 거죠. 그래도 줄 건 줘야 할 것 아니냐 이러면서 한바탕 싸우고 진주로 이사를 들어와 버렸어요.

(본문 13)

 

 

 

역사에서 보면 정의는 항상 이겼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진실은 밝혀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 때문에 이 나이에라도 밝혀보자 싶어 밝히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개인사를 이렇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사건의 진실규명과 아버지를 비롯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회복,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억울하게 가신 넋들을 위로하고 살아남아서 고통스러웠던 유족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남은 여생이나마 마음 편히 살다 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직도 실체를 밝히지 못한, 불법적 살인에 참여한 이들의 가슴속 불안과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본문 24)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학살당하셨는지 알고 계신 내용을 말씀해주세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무 죄없이 갔다고 해요. 엄마 따라 밭에나 논에나 갈 때 위에 마을 구장이 열 살 정도 많은데, 길에서 만나면 그 할배가 우리 엄마한테 인사를 45도로 굽혀서 하는 걸 봤어요. 우리 엄마는 새파란 나이였는데도, 인사를 받기는커녕 고개를 홱 돌려버렸어요. 지나가고 나면 더런 놈 나한테 인사를 해? 저놈이 들어가지고 죄 없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 도장 받아가서 다 죽게 만들었다고. 지는 도망 나와삐고, 인사가 뭣이고 더런 놈이랬어요. 논이나 밭에 따라갈 때 그 아저씨가 자주 만나지더라고. 위에 마을이거든요. 저는 그 나이 든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엄마가 이상하고 나빠 보였어요. 볼 때마다 그래서 엄마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었어요. 엄마가 그 사람만 보면 이를 갈더라고. 그때는 자세한 사연을 몰랐고, 나중에 제가 처녀 때에야 그 사연을 들었어요.

(본문 107~108)

 

 

 

박남숙 유족의 아버지 박사근불(당시 28) 씨는 진주 본성동에서 철공장을 했다. 육이오 나던 해 7월 초 새벽에 사복 경찰이 권총을 들이대면서 박사근불이 나오라고 해서 체포해 간 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같이 살던 작은아버지 박문우 씨는 형님이 대한청년단에서 근무하고 새벽에 들어왔다고 했다. 박남숙 씨의 이모가 당시 교도관이어서 아버지 옷을 이모 편으로 전달하곤 했으며,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가기 전 이모에게 우리 숙이가 보고 싶다고 했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경찰에 이마를 맞아 이모가 속치마를 뜯어 이마에 매어주었다고 한다.

사람을 실은 트럭이 명석면 용산리로 갔다는 것을 이모 편으로 듣고, 할머니, 어머니, 고모부가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비가 오는 데다가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고랑에는 핏물이 흘렀다고 한다.

(본문 126)

 

 

 

 

-정병표씨는 아버지가 그렇게 학살로 돌아가셨다는 걸 언제 아셨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세 살 됐을 때지. 그 당시에는 이것저것 아무것도 모르고 자랐고.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저희 어머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 해줬어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그 당시 고통이 심해가지고 (아버지가 나가서 학살되기 이전에) 밤이면 누군가 나타나서 사람을 찾고 하니까 숨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리고, 아버지가. 그래서 (그걸 봐왔던 어머니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충격이 커 놓으니까 어머니 혼자서만 감추어 놓고 있고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거라. (밤이면 누군가 아버지를 찾으러 온 기억 때문에 어머니가 충격이 커서.)

그래 이제 엄마보고 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한 번 내가 딱 물어봤어. ‘좀 있으면 알게 될 거다이 말이 끝이었어요.

(본문 222~223)

 

 

 

 

지가 안 겪어보면 아무도 모른다. 지가 겪어봐야 그렇게 살았다 싶으지. 아무도 모르기로. 대통령이 공약을 했다 하더만, 이거 해결해준다고. 나라가 이리 시끄러운데 해결이 되겠나. 그런데 뭐 광주니 어디니 샀는 거는 자꾸 보상 주고 그런다매. 그런데 모르지. 내 평생에 될 건가 안 될 건가 몰라도 만약에 못 하고 죽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다. 진주시장이 (위령공원 장소를) 어디라고 확실히 정해는 안줘도 해준다고 약속을 했다 하대. 기대는 하지만 그 기대가 설 것인지 어그러질 것인지는 모르지. 딱히 할 말도 없다. 서러운 거 그거는 말로 다 못하겠다. 다문 얼마라도 보상받고 위령제 지내는 그거라도 있으면 내가 풀고 죽겠는데 그것도 못보고 죽으면 너무너무 한이 많을 것 같아.

(본문 295)

 

 

 

 

 

 

추천글

아버지를 누가 어떻게 지시하여 왜 죽였는지 알지 못하는 아들 딸들의 기막힌 이야기.

그리고 좌익 가족으로 몰려 평생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

진주지역 보도연맹 관련 피학살자들과 유족들의 기막힌 사연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다시 되새김질합니다. 살아있었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수많은 청년의 억울한 죽음을 우리 모두 기억하여 유족들에게도 위로가 되고 구멍 난 현대사가 바르게 채워지기를 기대합니다.

- 김동춘(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성공회대 교수)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자식들도 이제 70대 노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이란 이유로 끌려가 대한민국 군경에게 무참히 학살당할 때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유복자가 만 70세다. 이들 1세대 유족이 모두 숨지고 나면 더 이상 민간인학살의 역사를 증언해줄 이들도 사라지게 된다.

기억은 언젠가 잊히기 마련이지만 기록은 역사가 된다.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의 아픔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던 아이가 빨갱이 자식이란 낙인과 연좌제의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온 가슴 아픈 이야기가 펼쳐진다.

뒤늦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접하고 유족회 활동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찾아 각성해나가는 과정이 감동적이다.

 

 

 

 

 

 

 

 

 

주제어: 한국근현대사, 민간인학살, 진주민간인학살, 민간인학살증언집, 보도연맹

분류: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한국근현대사 > 해방전후사/한국전쟁

국내도서 > 역사 > 테마로 보는 역사 >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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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6. 2. 28. 15:45 Category : 피플파워가 낸 책 Writer : 알 수 없는 사용자

 

 

 

제목 대한민국 악인열전

부제 교과서에선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

펴낸날 2016년 2월 24일
가격 13,000원
반양장본 | 228쪽 | 140*200mm
ISBN 979-11-86351-03-1(0391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지은이 임종금

 

 

 

책 소개

 

고향 사람 200명을 무참히 학살한 이협우
일제시대 고문기술 70%를 개발한 노덕술
민간인·부하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을 죽인 김종원
일본 국회의원이 된 깡패 출신 친일파 박춘금
안두희를 ‘안 의사’로 불렀던 이승만의 양자 김창룡
일제가 동상까지 세워 준 친일파 김동한
어린 학생도 고문한 악질 친일헌병 신상묵, 박종표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고, 기존 역사책에서도 거의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한 사람들조차 스쳐 들은 이름일 따름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던 그들의 뿌리를 캐봤다. 역시나 일제 때부터 악질 친일 반민족 행위자였다. 상상을 뛰어넘는 그들의 가공할 만한 악행을 역사의 법정에 세운다.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후세에도 전해야 한다.

 

 

 

지은이 소개

 

경남도민일보 임종금 기자

 

1981년 경북 경주시 양남면에서 태어났다. 2001년부터 여러 인터넷 미디어에 글을 꾸준히 기고했다.
2009년 <딴지일보> 필진이 됐으며, 2011년 <경남도민일보> 기자로 입사, 현재는 미디어 팀장을 맡고 있다. 어릴 적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를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방법을 늘 생각해왔다. 특별히 어느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보다는 ‘악인’, ‘학살’, ‘근현대 한반도 생태’, ‘기상재해’, ‘에버그린 콘텐츠(기존 데이터 재활용)’ 등 관심 있는 주제를 설정하고 자료를 발굴하고자 애쓰는 편이다.
2014년 10월, 에버그린 콘텐츠의 일환으로 경남도민일보에 연재한 ‘지난 기사 새로쓰기’로 2014 지역신문 콘퍼런스에서 금상을 받았고, 2015년엔 경남도민일보 뉴스펀딩 기획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로 상당한 후원을 받기도 했다.

 

 

 

 

목차

 

첫 번째
백두산 호랑이를 자칭했던 살인마 / 김종원
지옥에서 살아온 사람
김종원의 살육
‘골로 간다’는 말을 만든 사람들
“충무공 이순신 같은 사람”
김종원 연표
작은 이야기 1편-좌익과 우익은 민간인을 얼마나 죽였는가?
참고자료

 

두 번째
고향 사람을 무참히 학살한 / 이협우
우익단체 민보단장 이협우
피로 물든 내남면
벙어리 국회의원
“사형보다 더한 극형 있다면”
이협우 연표
참고자료

 

세 번째
일본 국회의원이 된 극렬 친일파 / 박춘금
조선인 학살의 수혜자
상애회의 폭력활동
일본 국회의원 박춘금
“학도병 4천이나 5천 죽어도…”
박춘금 연표
작은 이야기 2편-박춘금과 김원봉의 고향 ‘밀양’
참고자료

 

네 번째
악질 헌병의 대명사 / 신상묵·박종표
침략의 시발점 ‘헌병 보조원’
그들은 어떻게 고문했나?
어린 학생도 무자비하게 고문
처벌이 아니라 출세…3·15의거 때 김주열 시신 유기
신상묵·박종표 연표
작은 이야기 3편-일제와 맞선 일본인들
참고자료

 

다섯 번째
악질 경찰의 대명사 / 노덕술
해방 후 서울, 어느 청년의 죽음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노덕술 못지않았던 악질 친일 경찰들
조작의 달인 ‘노덕술’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잔다”
노덕술 연표
참고자료

 

여섯 번째
음모와 공작의 달인 / 김창룡
김창룡의 죽음
일제도 놀란 ‘실력’
빨갱이 때려잡는 데 귀신
빨갱이가 없으면 만들어라
권력욕이 부른 죽음
김창룡 연표
작은 이야기 4편-이승만 권력구조의 변화
참고자료

 

일곱 번째
일제도 감복한 친일 인사 / 김동한과 후예들
일제가 세운 동상
변신의 귀재
“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
김동한의 후예, 간도특설대
만주의 친일파 군상들
김동한 연표
작은 이야기 5편-공산주의와 독립운동
참고자료


 

 

책 속으로


이협우 학살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온 가족을 몰살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 보복을 우려한 행동으로, 어린아이도 철저히 죽였다.
검찰 조사에 의하면 10세 미만 어린이 35명이 피살됐으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를 동시에 쏴 죽이기도 했다. 1949년 12월 25일 성탄절 노곡리에서 살해당한 최상화와 최동식은 불과 8살, 4살이었다. 이협우는 그들이 빨갱이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죽였다.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빨갱이를 죽였다’고 하면 넘어가던 시대였다.
(본문 48~49쪽)

 

“증거상 드러난 피고인들의 죄과에 대하여 형법상 사형보다 더한 극형이 있다면 본 검사는 서슴지 않고 그 극형을 택할 것이나 부득이 현행법상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한다”
-이협우 학살 사건을 조사한 이영호 검사의 논고
(본문 58쪽)

 

“하판락이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했다. 그리곤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렸다. 증언을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중략…)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본문 139쪽)

 

김창룡은 축구를 좋아했으며, 특무대(현 기무사) 축구팀에 국가대표 출신을 넣는 등 최강의 팀으로 만들었다. 1953년 10월 특무대 축구팀은 조선방직 축구팀과 전국축구대회 준결승에서 맞붙었다. 전후반과 연장을 치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대회규정에 따라 추첨으로 조선방직 팀이 승리했다. 화가 난 김창룡은 “저놈들 다 집어넣어!”라고 소리쳤다. 특무대 요원들이 공포탄을 쏘며 경기장에 난입했고, 주심은 경기장 담벼락을 뛰어넘어 도망쳐 버렸다. 이성을 잃은 김창룡에게 경기를 관람하고 있던 올림픽 영웅 손기정 씨가 달려와 말렸다. 그러나 김창룡은 “이놈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
(본문 181쪽)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화가 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모든 게 상상 그 이상이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여름 누리꾼을 분노케 한 경남도민일보 뉴스펀딩 기획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이름들’을 기초로 썼다.


한국근현대사는 살육과 배반, 참혹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시대였다.
무수한 사람이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단죄 받지 않고 넘어갔다.
그 가운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8명을 역사전공 기자가 고르고 골랐다.


이들은 그냥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어린 아이도 죽였고, 자기 부하도 죽였다. 화풀이를 하거나 장난 삼아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이들은 그냥 친일을 한 것이 아니다.
일제마저 그들의 솜씨와 노력에 눈물을 흘릴 정도였고, 조선인으로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지위와 호사를 누렸다.


이들은 그냥 출세를 한 것이 아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중용 돼 젊은 나이에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위에 올라 세상을 떨게 했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친일과 학살, 고문, 음모, 공작, 불의를 생생하게 목도하는 순간 당신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주제어: 학살, 친일파, 이승만, 한국현대사, 현대사인물
분류: 역사, 한국사, 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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