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 5
- <한글세대를 위한 함안 금라전신록 산책> 1 2023.12.15
-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 1 2023.05.17
-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 2023.05.16
- 함안의 역사와옛날 사람들의 삶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2020.12.18
- 함안총쇄록 답사기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 2020.06.02
한글세대를 위한 함안 금라전신록 산책
제목 한글세대를 위한 함안 금라전신록 산책
펴낸날 2023년 12월 7일
가격 16,000원
반양장본 | 168쪽 | 152*225mm
ISBN 979-11-86351-63-5(0390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지은이 김훤주
책 소개
가슴에 새겨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금라전신록
『금라전신록』은 함안이라는 지역을 바탕 삼아 만든 저작물이다. 지역을 중심에 놓은 문집은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 통틀어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흘러가고 지역이 메말라가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금라전신록』에 담겨 있는 옛사람들의 행적과 시문은 함안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행적들이 적지 않다. 가슴에 새겨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풍성하다.
지금 관점으로도 여전히 필요하고 뜻깊은 부분을 먼저 추렸다. 재해석이 가능하거나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만하거나 재미있게 읽힐 거리도 챙겼다.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하고 새롭게 의미를 더하면서 설명과 해설을 입히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 출생
1999~2023년 경남도민일보 기자
저서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경상권)>(비매품)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
<가야로 가야지-쉽고 재미있는 가야 역사> 등
목차
머리말_이 좋은 고전을 기억 너머로 보내지 않기 위하여
1장 인물
1. 어변갑의 뛰어난 글재주
2. 글솜씨는 뛰어났지만 불행했던 조욱
3. 단종을 위하여 숨어 살았던 조려
4. 조려의 후손은 벼슬을 하지 않았을까?
5. 그러면 고려 충신의 후손은 어떻게 했을까?
6. 2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
7. 옛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8. 용퇴가 왜 중요할까
9. 선물 받은 귀한 은어를 먹지 않은 이유는
10. 죽을 때 웃을 수 있다면
11. 유머 뒤에 우뚝했던 기개
12. 소년급제는 위험하다
13. 서울 조정에서 사투리를 썼다
14. 소귀에 경 읽기를 한 까닭은
15. 착한 사람은 자기보다 어려도 공경했다
2장 느낌과 생각
1. 비둘기 시
2. 달팽이 시
3. 낙방의 씁쓸함
4. 아들의 출세가 기쁜 까닭
5. 늙음을 노래함
6. 자식을 잃은 슬픔
7. 난리통에 고향 생각
8. 가야의 후예라는 뚜렷한 인식
9. 황은이 맞는 걸까?
10. 까마귀가 어리석나 사람이 어리석나
11. 언제나 좋은 물 이야기
3장 풍속
1. 천둥번개는 하늘의 경고였다
2. 옛날 결혼과 요즘 결혼은 무엇이 다를까
3. 지금과 달리 흔했던 처가살이
4. 부모님 봉양을 위해 외직을 한다
5. 친인척이 오자 벼슬 자리를 바꾸었다
6.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그만두었다
7. 부자간의 벼슬 바꿔치기
8. 이 정도는 아파야 벼슬을 그만두지
9. 부모 초상에는 몰골이 수척해야 했다
10. 그때도 극심했던 서울 중심주의
11. 배척되지 않는 불교, 까닭은?
4장 금라전신록
1. 『금라전신록』이란 무엇일까?
2. 『금라전신록』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3. 『금라전신록』을 왜 편찬했을까?
4. 『금라전신록』 인쇄는 언제 되었을까?
5. 『금라전신록』에서 ‘금라’는 무엇일까?
6. 『금라전신록』을 편찬한 조임도는
7. 자료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8. 역적 김안로의 글을 전부 실은 까닭은
9. 묘갈명·묘비명·묘지·신도비명 등은 요즘으로 치면 무엇일까?
부록 : 『금라전신록』 상·하권 목차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바람이 세 차례 거세게 몰아치니 고기가 갑옷으로 변하는데 둘씩 짝을 지으려면 원래 실력이 어금버금해야 하지만그대 이름만 용문 위에 올라도 그만이지.”
이 시는『금라전신록』의 ‘집현전 직제학 어변갑 행장’에 들어 있다. ‘세 차례 몰아치는 바람’은 세 번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과거 시험 절차를 비유한다. 다음에 나오는 ‘고기(魚)가 갑옷(甲)으로 변한다(變)’는 한자로 쓰면 바로 어변갑(魚變甲)이 되고, 아래로 이어지는 내용은 바로 그 어변갑이 2등과 큰 격차를 보이며 1등 장원을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의 용문(龍門)은 과거 합격을 뜻한다. (본문 16쪽)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두렵고, 죽은 뒤의 세상을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렵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떨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다. 그래서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서도 의연했던 옛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성혼(1535~1598년)이 친구 조감을 위해 쓴 앞의 묘갈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되새길 만한 내용이다.
“죽고 사는 즈음에도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인품이 높고 삶을 대하는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힘쓰고 원한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
(본문 50쪽)
동생 집의 불쌍한 비둘기
암컷은 새끼를 사랑하고 수컷은 암컷을 사랑하여
‘구구’ 하는 것이 주인의 사랑에 보답하는 듯하구나
하루아침에 잇달아 고양이 입에 들어갔네
새장을 소홀히 했으니 누구의 잘못인가
고양이를 탓하겠나 비둘기를 탓하겠나
단속 제대로 못한 스스로를 탓해야지.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동물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둥지를 만들어주고 애지중지 기르던 비둘기가 고양이 먹이가 된 후 느꼈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난 시다.
어변갑이 쓴 이 시에서 ‘구구 하는 것이 주인의 사랑에 보답하는 듯하구나’라는 대목을 보면 비둘기를 기르면서 누리는 즐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금은 집에서 기르는 일이 드문 비둘기가 반려동물이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본문 66~67쪽)
본문에 나오는 ‘나’는 성혼(1535~1598년)이라는 인물이다. 조감의 장인 백인걸을 스승으로 모시고 같은 집에서 다섯 살 많은 조감과 동문수학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적은 글이다.
성혼은 조정견의 아들 조감과 백인걸의 딸이 어떻게 해서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졌는지를 전해주고 있는데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딸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훌륭해서 며느리로 삼았다니 요즘 20~30대가 보면 깜짝 놀랄 일이다.
성혼의 아들과 조감의 딸이 맺어진 사연은 더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성별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양쪽 아버지의 결정만으로 결혼이 성사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데에는 시대 상황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결혼의 주체가 당사자 개인이 아니라 가문이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남자와 여자 개인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세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는 결혼이 갖는 의미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본문 104~105쪽)
옛날에는 부모 초상이 나면 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삼년 동안 죽만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전복죽이나 잣죽 같은 영양이 풍부한 것 말고 쌀을 갈아서 만든 묽은 죽이었다. 몰골이 많이 수척해져야 초상을 제대로 치렀다는 인정을 받았고 본인 역시 도리를 다하려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과 마지막 떠나는 길에 예의를 다하고자 하는 심정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효도인지는 의문이다.
스승 장현광(1554~1637년)이 제자 조임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되새겨볼 만하다. 그는 1622년 어머니 상중이던 조임도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자네의 상례가 중도를 넘어 견디기 힘들다고 들었네. 효성을 다하는 도리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을 잘 보존하는 한편으로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선조를 추모하는 일을 길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네.”(본문 124~125쪽)
함안에는『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이라는 책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인 1639년에 함안의 선비 조임도가 갖가지 자료를 모아 묶어낸 책이다. 책의 성격과 내용은 제목 ‘금라전신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금라’는 함안을 가리키는 옛날 별명이다.『세종실록 지리지』(1452년)와『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그리고『고려사』(1454년)에 이르기까지 아시량(阿尸良)·아나가야(阿那伽倻)·함주(咸州)·사라(沙羅)와 함께 소개되어 있는 별호이다.
‘전신록’에서 ‘전’은 전해 온다는 것이고 ‘신’은 믿음직하다는 뜻이며 ‘록’은 기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믿음직하게 전해져 오는 기록이 전신록이다. 금라까지 합하면 함안에 전해오는 믿을 만한 기록을 담은 책이『금라전신록』이다. (본문 136쪽)
『금라전신록』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역을 중심에 놓고 여러 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주관에 휘둘리거나 감정에 치우쳐 아무 이유 없이 누구는 빼고 누구는 넣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지역사회로부터 곧바로 지적과 외면을 당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조임도는 원칙을 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해 취사선택을 했다. 서문에 나와 있는데 ①인물과 문장이 모두 귀중하면 당연히 싣고 ②인물은 훌륭하지 않아도 문장이 사랑스럽거나 ③문장은 뛰어나지 않으나 인물이 아까우면 채택했으며 또 ④인물을 버릴 수 없는 경우는 문장이 전해지지 않아도 그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당성, 어느 누구로부터도 틀렸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객관성, 과거와 당대의 훌륭한 인물과 문장을 남김없이 후세로 전달하는 효용성 셋을 두루 아울러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본문 139쪽)
지역의 수령이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함안의 훌륭한 군수였고『함주지』의 편찬을 주도한 한강 정구를 보기로 들 수 있다. 그는 1586년 부임하자마자 사람을 시켜서 함안에 있는 훌륭한 인물들의 무덤을 찾아가 다듬도록 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제사까지 올렸다.
박한주는 연산군의 폭정에 충언을 아끼지 않다가 미움을 산 끝에 유배길에 올랐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자신보다 앞서 창녕군수를 지낸 선배인데다가 그 행적과 인품을 존경해서 그 무덤을 찾았다. 이밖에 이교·이원성·다물의 무덤도 찾아가 돌보고 다듬게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모두 효성이 지극한 효자들이었다.
정구의 이런 행보는 당연히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면서 새로 온 군수는 충성과 효도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소문도 나게 되고 새로 부임한 고을에서 깍듯하게 예우를 갖추는 예의 바른 인물이라는 평판도 얻을 수 있었다. 정구 군수에게 무덤 참배는 고을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본문 162쪽)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좋은 고전을 기억 너머로
보내지 않기 위하여
함안이 기록의 고장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함주지』·『함안총쇄록』과 더불어 손꼽히는 것이『금라전신록』이다.『함주지』는 수령과 지역 유지들이 함께 편찬한 읍지이고 『함안총쇄록』은 수령 개인이 기록한 일기이며『금라전신록』은 함안 출신 인물들의 훌륭한 행적과 뛰어난 시문을 한데 모은 책이다.
『금라전신록』에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행적들이 적지 않다. 가슴에 새겨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풍성하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금라전신록』이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과『금라전신록』에 전해지는 여러 좋은 내용을 함께 알리는 것도 뜻깊은 일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문을 곧이곧대로 옮기기보다는 앞뒤 맥락을 감안하여 좀 더 알기 쉽도록 적절하게 가감첨삭했다. 한문체 특유의 산만하거나 늘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략한 대목도 적지 않다. 한자는 최대한 적게 쓰려고 했으며 특히 인명은 ‘공’이나 ‘선생’으로 대신 부르는 것을 없애고 모두 이름 석 자로만 표기해 가독성을 높였다.
텔레비전 같은 대중 매체 덕분에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대중화되고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금라전신록』에 담겨 있는 옛사람들의 행적과 시문은 함안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주제어: 함안, 역사, 풍속, 금라전신록, 함주지, 함안총쇄록
분류: 함안, 역사, 문화, 지역,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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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 (1) | 2023.05.17 |
펴낸 날 : 2022년 12월 27일
가격 : 15,000원
반양장본 | 231쪽 | 152×225mm
ISBN 979-11-86351-55-0 0391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www.idomin.com
저자 : 김훤주
책 소개
말이산고분군에서 6.25함안전투까지
핵심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요약정리
임진왜란 영웅 40여 명 대거 소환하고
칠원민란 처음 알리며 별천계곡 숨은 얘기 발굴도
함안의 역사에 관련된 책은 많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이나 6.25전쟁 함안 전투는 이미 여러 책에서 다루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물 역시 여기저기에 그들의 업적을 적어 놓은 글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하면 함안의 역사를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사건 가운데에는 잘 알려진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는 칠원민란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내용을 꼼꼼하게 다루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사건을 알리는 것으로도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6.25전쟁 함안 전투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6.25 때 함안에서 그런 전투가 있었다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함안에서 그런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과정을 쉽게 소개하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인물 편에서는 그들의 활약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별로 구분해서 좀 더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인물은 가장 가까운 근대 역사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공감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밖에도 함안을 두고 기록의 고장이라고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는 내용과 지금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 가는 명소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이런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기록의 고장 함안이라는 명성을 더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머리말에서
작가 소개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출판국장과 환경전문기자로 일하며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함안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쓰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와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가 그것입니다. 이밖에 펴낸 책으로는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경상권)』(비매품)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 등이 있습니다.
차례
머리말 7
1.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9
탁월한 입지 선정 12
오랜 기간 조성된 가야 대표 고분군 13
한반도 최초로 말갑옷이 나온 마갑총 14
‘메이드인아라가야’ 말갑옷 16
금은 장식 고리자루큰칼도 18
계획에 따른 질서정연한 배치 19
아라가야의 순장은 언제부터 21
순장에도 공식이 있었을까 23
순장의 시작과 끝은 24
청동기문화와의 연관성 암각화고분 25
거대한 봉분의 숨은 비결 27
가장 높고 크고 기다란 고분은? 29
남문외고분군, 말이산고분군과 하나가 되다 30
아라가야를 잘 갈무리한 함안박물관 32
불꽃무늬가 새겨진 다양한 토기 34
멋진 산책이 함께하는 말이산고분군 38
2. 아라가야의 왕성이 있었던 가야리 유적 39
3.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 43
4. 신라가 쌓은 아라홍련의 고향 성산산성 47
가야가 쌓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49
신라 목간이 출토된 성산산성 50
700년 잠에서 깨어난 아라홍련 52
5. 고려 시대의 역사 인물 55
홍건적을 물리친 이방실 장군(1298~1362) 57
일찍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윤환(1303~1386) 66
고려 충신 이오 68
고려 충신 조열 71
고려 충신 조순 73
6. 조선 시대의 역사 인물 75
생육신 어계 조려 77
용퇴하고 무진정을 지은 조삼 80
서원을 최초로 세운 주세붕 83
주재성과 무기연당 87
7. 임진왜란 영웅들 95
김언수| 박제인| 박진영| 방흥| 안민| 안신갑| 안황| 안희| 오운| 유숭인| 윤탁연| 이간·이희 형제| 이령| 이만성| 이명호와 동생들| 이숙| 이정| 이집·이분형| 이칭| 이휴복| 정구룡| 제말| 조민도| 조방| 조붕| 조신도| 조응도| 조종도| 조탄| 차천홍·차억세| 황경헌| 동래할멈| 조준남·조계선부자| 주익창·주필창 형제부부
8.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 151
전란을 이겨낸 위로와 자축의 모임 153
미래세대까지 함께한 자리 157
지금도 이어지는 그날의 모임 159
9. 칠원에도 민란이 있었다? 161
10. 일제에 맞선 함안의 인물들 165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은 주시성 167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대암 이태준 168
사랑의 독립운동가 산돌 손양원 173
노령에도 만세시위에 앞장선 안지호 의사 176
일제 경찰을 응징한 조삼귀 여사 179
11. 경남 최초 최대였던 함안의 3.1만세운동 183
경남 최초 칠북 연개장터의거 185
두 차례 벌어진 대산면 평림 의거 187
칠북면 이룡 의거 187
3000명에 이른 함안읍 의거 188
함안에서 가장 큰 군북 의거 190
네 차례 시위를 벌인 칠원 의거 191
군북공립보통학교 항일시위 192
법수면민 항일시위 193
12.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1950년 함안 전투 195
섬진강을 넘어온 북한군의 기습 197
함안 서부 산악 지대 전투 199
함안 동부 평야 지대 전투 201
마무리는 소규모 근접전으로 203
13. 기록의 고장 함안 205
가장 오래된 읍지 『함주지』 207
유일한 지역 문학·인물사전『금라전신록』 213
조선 후기 함안의 풍물을 담은 『함안총쇄록』 216
14.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명승지 221
후배 군수들도 즐겨 찾은 자리 223
곳곳에 한강 정구의 자취가 226
후배 군수도 흔적을 남겼고 228
한강을 기리는 뒷사람들의 자취도 230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30년 전 당시에는 동북아시아 전체에서도 이런 실물은 귀한 것이었고, 한반도에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나타난 것은 함안이 최초였습니다. 앞서 경주·동래·합천 등에서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물고기 비늘 모양의 작은 쇳조각이 출토된 적이 있었는데, 마갑총에서 원형에 가까운 말갑옷이 출토되면서 그것들이 말갑옷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갑총 말갑옷은 이런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지금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6쪽,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순장이 없어지는 과정도 차이가 납니다. 가락국은 지배계층이 무너지면서 순장이 줄어들고 사라졌습니다. 순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서기 400년 침공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반면 아라가야는 지배계층이 건재하고 커다란 고분은 계속 지어지는데도 6세기 초반에 순장이 축소·소멸되었습니다. 순장할 능력은 그대로였지만 해당 지역 공동체에서 순장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갈수록 옅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쪽,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왕성에 걸맞은 커다란 규모의 취사 전용 건물터도 확인됐습니다. 길이 11m와 너비 5m에 이르는 기다란 네모꼴인데 암반을 파내어 만들었습니다. 취사 공간임을 알려주는 아궁이와 구들·굴뚝, 물을 담아둘 수 있도록 암반을 파서 만든 구덩이, 그리고 취사용 토기와 그릇받침도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42쪽, 아라가야의 왕성이 있었던 가야리 유적)
당산유적은 2004년 발굴에서 확인됐는데 우리나라에서 고대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던 가장 큰 자리입니다. 전체 길이는 40m이고 너비는 최대 15m에 이르며 면적은 최소한 130평(400㎡) 이상입니다.
2020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발견돼 눈길을 끌었던 사비 백제의 대형 건물지가 가로 12m 세로 7m인 데 견주면 엄청난 크기이고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45쪽,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금세 탁 트인 산성이 나옵니다. 무성했던 숲을 다듬어 만든 둘레길은 가볍게 산책하기에 그만입니다. 굽이마다 멋진 나무들이 보기 좋게 들어서 있습니다. 평상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거리낌 없이 펼쳐지는 함안의 풍경도 일품입니다. 여러 시대의 역사와 유물이 어우러져 있는 성산산성은 이제 가벼운 걸음으로 한 바퀴 둘러보는 즐거움도 갖추고 있습니다.
(53쪽, 신라가 쌓은 아라홍련의 고향 성산산성)
“돌아와 칠원에 있을 때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 되자 윤환은 재산을 풀어 그들을 구제했다. 또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물을 빌려주고 받은 증서는 모두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윤환은 700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곡식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빌려간 이들의 빚까지 탕감해 주었던 것입니다.
(67쪽, 고려시대의 역사인물)
주세붕이라는 인물을 역사에서 크게 치는 이유는 서원의 설립으로 여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교육제도가 생겨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전에는 교육기관이 나라에서 고을마다 하나씩 세운 향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고 싶어도 향교 말고는 갈 데가 없어 그만큼 교육의 기회가 적었습니다. 소수서원이 생기면서 전국 모든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서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를 높게 평가하는 기록이 『명종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서원이 옛날에는 없었다. 서원의 설치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는 실로 커다란 결점이었다. 주세붕이 여기에 뜻을 두고 사람들의 비웃고 헐뜯는 것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니 옛 군자보다 공적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84쪽, 조선시대의 역사인물)
무기연당은 전남 담양군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조선 시대 정원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아름다운 전통 정원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재성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운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대신 이렇게 그럴듯한 정원을 꾸며놓고 유유자적 살았다는 것이 더 훌륭할 수도 있습니다.
(92~93쪽, 조선시대의 역사인물)
임진왜란이 끝난 지 4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나 책을 통해서 임진왜란을 경험하다 보니 승전의 장면에 열광하고 두드러진 몇몇 영웅들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 기리고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97쪽, 임진왜란 영웅들)
1606년 봄 조선 사신이 화친을 하고 돌아올 때 왜가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냈는데 동래 할멈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할멈은 늙은 어머니가 있었는데 난리를 만나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돌아와서 어머니를 찾았더니 할멈과 마찬가지로 왜국으로 잡혀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왜국에 10년 동안 있었는데도 서로 그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던 겁니다. 할멈은 친족들에게 어머니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다시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갔습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다 마침내 어머니와 만나게 됩니다.
(142쪽, 임진왜란 영웅들)
뱃놀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022년 함안박물관에서 관련 자료를 확보했는데, 이 가운데 해방 이후를 보면 이렇습니다. 함안을 중심으로 ‘낙강동범계’라는 모임이 1955년 7월 합강정에서 총회를 하고 조직되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낙동강 뱃놀이를 이어간 이들의 이름과 시를 담은 『낙강동범 계안 부 시집』을 보면 이들의 뱃놀이는 1957년 7월(낙동강)과 1960년 7월(정암강) 등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여기서도 1607년 임진왜란 영웅들의 유쾌한 뱃놀이는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159~160쪽,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
『고종실록』에 따르면 ‘수천 명’이 모였다고 했는데 당시로서는 칠원에 사는 거의 모두가 결집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비록 일시적이었다 해도 대단한 규모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칠원민란은 그 이상 구체적으로 밝혀진 부분이 거의 없어서 연구·조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64쪽, 칠원에도 민란이 있었다?)
조삼귀 여사는 재판과정에서 “내 남편과 내 나라의 원수를 갚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어린 아들은 그새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후 한 점 혈육 없이 외롭게 살다가 1948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는데 가야읍 관음사 입구에서 말이산고분군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위쪽 왼편에 그 열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81쪽, 일제에 맞선 함안의 인물들)
1932년에는 군북공립보통학교에서 3・1독립만세운동 13주년을 맞아 6학년 학생들이 항일시위를 실행했습니다. 2월 29일 정오 4~6학년 대부분과 1~3학년 일부 등 280여 명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학교를 나와 미리 준비한 전단을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습니다. 장날을 맞아 북적이는 군북시장을 거쳐 군북공원에서 만세삼창을 한 다음 군북역을 지나 신창학교 운동장에서 해산했습니다.
전단에는 ‘조선어 시간을 6시간으로 환원하라, 조선 역사 시간을 배정하라, 식민지 교육과 노역을 금지하라, 학교생활에 자치권을 달라, 나카미츠 교장과 이점용 훈도는 물러가라’는 요구 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192~193쪽, 경남 최초 최대였던 함안의 3.1만세운동)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24~25일 목포와 여수를 점령해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 28일 섬진강을 건너 하동에 집결하더니 29일 아침 마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이 31일 진주에 이를 때까지 북한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낙동강 방어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미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습니다.
(198쪽,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1950년 함안전투)
『함안읍지』나 『칠원읍지』가 있는데 이것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
류의 것들은 조선 말기 중앙 조정의 방침에 따라 만든 것으로 다른 지역에도 이와 비슷한 읍지는 제법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넘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기록 유산이 함안에는 무려 세 가지나 됩니다. 『함주지』, 『금라전신록』, 『함안총쇄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풍성한 기록물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함안으로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207쪽, 기록의 고장 함안)
오횡묵은 『함안총쇄록』에서 이 양천을 두고 “선생이 명명했다”고 적었습니다. 여기 선생은 두말할 것 없이 한강 정구를 가리킵니다. 정구가 지은 양천은 지금 별천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국어학자들은 음운 변화의 결과로 설명합니다. 양천이 우리말로는 볕+내인
데 이 볕내가 자음접변 때문에 변내 또는 별내로 소리나는 것을 다시 한자로 고정시켜 별천(別川)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입니다.
(227쪽,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명승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함안 역사·인물의 보편적인 내용 다루면서도
칠원민란 등 첫 소개, 임진왜란 영웅 중점 발굴,
지금껏 이어지는 낙동강 뱃놀이의 연원도 밝혀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은 말이산고분군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문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함안 역사의 첫머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지금 함안의 정체성도 여기에 기댄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이산고분군과 이어지는 가야리유적·당산유적, 성산산성 등은 최근까지 이뤄진 학계의 연구와 발굴 성과를 최대한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산고분군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만큼 개별 고분보다는 전체적인 모습과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중요한 고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다른 가야 이야기를 곁들여 아라가야를 좀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분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시대마다 달라지는 특징적인 내용도 두루 담으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의 함안이 1500년 전 아라가야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더듬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말이산고분군은 왕궁이 있었던 가야리유적이나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과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최대의 위기를 맞아 함안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고 어떻게 맞섰는지를 최대한 풍부하게 담은 것도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의 특징 가운데 한입니다. 남겨진 기록이 많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기록이 한 줄밖에 되지 않더라도 찾고 살려서 적었습니다. 덕분에 마흔이 넘는 분을 임진왜란 영웅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숨겨진 임진왜란 영웅들은 지금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일은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통쾌한 승리의 역사와 빛나는 영웅들만 나라를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꺼이 나섰던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영웅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에 얽힌 얘기도 있습니다. 1607년 1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한강 정구 함안군수 박충후 등 35명이 함안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함께 어울렸습니다. 전란 직후 전란을 몸소 겪은 이들이 벌인 위로 자축의 뱃놀이였습니다.
당대에 이미 이름이 높았던 이들이 참여하고 중심이 됐던 모임인지라 오랫동안 그 영향력이 이어졌습니다. 1600~1800년대는 물론이고 20세기 들어선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에도 그들을 기리는 뱃놀이가 계속되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당시 뱃놀이에 참여한 35명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칠원민란은 아마 함안·칠원에 관련된 역사 서술 가운데 최초이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기록을 나름대로 찾기는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학계의 연구도 전혀 없다시피 해서 참고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찾아진 만큼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1950년 6.25전쟁 초기 함안전투도 여태까지는 전투 그 자체의 치열함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에서는 당시 그렇게 치열하게 함안전투가 벌어진 배경과 함안전투 승전이 전체 국면에 끼친 영향을 알기 쉽게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밖에 말미에는 함안이 기록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도 한 꼭지 다루고 최소한 430년 전부터 선조들의 놀이 문화가 겹겹이 쌓여온 별천계곡에 대한 이야기도 따로 떼어 적었습니다. 다들 한 번은 눈길을 줄 만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주제어 : 지역, 함안, 칠원, 말이산고분군, 역사 인물, 문화, 임진왜란, 고려동, 생육신, 성산산성, 일제강점기, 함안전투, 갓뎀산
분류: 함안, 역사, 문화, 지역,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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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 날 : 2022년 9월 30일
가격 : 15,000원
반양장본 | 140쪽 | 146*210mm
ISBN 979-11-86351-49-9 0391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www.idomin.com
저자 : 김훤주
pole@idomin.com 010-2926-3543
책 소개
잠들어 있는 옛 읍지에
새 삶의 숨결을 불어넣는 책
<칠원읍지>는 지금은 경상남도 함안군에 포함되어 있는 칠원읍과 칠서면·칠북면 등 삼칠 지역을 다룬 책입니다. ‘칠원과 함안은 지금 하나의 군인데 책을 왜 나누어서 썼을까요?’ 1900년대까지만 해도 삼칠 지역은 별도로 독립된 칠원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칠원읍지〉라는 책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칠원과 함안이 하나로 통합이 된 것은 1908년입니다.
<칠원읍지>는 인물과 역사, 건물과 유적은 물론이고 자연환경과 특산물까지 그야말로 온갖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만물상회 같은 책입니다. 그 때에 비해 세상이 너무 달라져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내용들도 많습니다.
<칠원읍지>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들여다보고 싶어도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안군에서 1997년 <함안군지>를 펴낼 때 제2권으로 <국역 칠원읍지>를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이야기였습니다. 옛날 말투가 많은 데다 빠뜨리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를 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칠원읍지>에 담긴 내용을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고요. <칠원읍지>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칠원읍지>에 이런저런 내용이 담겨 있구나 그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청소년용으로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를 만들면서 되도록 욕심을 줄였습니다. 내용을 그대로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는 생각 대신에 <칠원읍지>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과 이야기를 골라 담았습니다.
간략해서 아쉽다 싶은 대목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옛 서적의 내용을 조금 보탰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옛날과 지금의 모습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라 할 수 있겠습니다. -‘들어가면서’ 중에서
저자 소개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경남도민일보에서 출판국장과 환경전문기자로 일하며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펴낸 책으로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경상권)>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이 있다.
차례
들어가면서 ·········· 8
1부 우리는 어떻게 옛날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을까요?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과거를 알 수 있을까요? ·········· 14
조개무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16
고인돌이 무덤이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됐을까요? ·········· 17
귀한 유물이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 18
글로 남겨진 기록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19
가장 오랜 기록이 전하는 칠원과 함안 ·········· 21
물건이나 글을 통해 모든 역사를 다 알 수 있을까요? ·········· 22
기록과 유물 중 어느 쪽이 역사를 이해하기 좋을까요? ·········· 23
우리나라의 기록유산은 얼마나 될까요? ·········· 24
함안은 기록유산의 보물창고 ·········· 25
<함안총쇄록>에 <금라전신록>까지 ·········· 26
옛날과 오늘날의 기록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 28
옛날과 오늘날 기록물 내용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29
2부 <칠원읍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1. <칠원읍지>는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 34
2. <칠원읍지>에 담긴 칠원의 옛 이름 ·········· 36
3. <칠원읍지>에 담긴 자연 ·········· 38
경양대 ·········· 38
우질포 ·········· 40
멸포 ·········· 41
서천 ·········· 42
4. <칠원읍지>에 담긴 건축물 ·········· 45
무기연당 ·········· 45
칠원향교 ·········· 50
덕연서원 ·········· 55
향현사 ·········· 56
무산사 ·········· 57
홍포사 ·········· 59
태양서원·청계서원과 충효사 ·········· 61
장춘사 ·········· 62
광심정 ·········· 65
상봉정과 합강정 ·········· 67
5. <칠원읍지>에 담긴 역사유적 ·········· 69
칠원읍성 ·········· 69
선정비 ·········· 71
선정비를 세워준 이유는 ·········· 73
낙동강 뱃놀이 ·········· 74
지금은 사라진 남정자 ·········· 80
6. <칠원읍지>에 담긴 색다른 이야기들 ·········· 82
칠원에서 민란이? ·········· 82
막강했던 고을 원님의 권한 ·········· 84
그러면서도 파리목숨이었던 원님 ·········· 85
조선에 이미 근무 평가가 있었다고? ·········· 86
수령의 봉급은 얼마였을까? ·········· 88
조세 싣고 서울 가는 머나먼 뱃길 ·········· 90
칠원에 화전민이 있었다? ·········· 91
나이로 벼슬을 했다 ·········· 92
7. <칠원읍지>에 담긴 옛사람들의 효도와 절개 ·········· 96
귀한 음식을 부모님께 올리고 ·········· 97
효자보다 더했던 효부의 효성 ·········· 98
똥 맛보기와 손가락 자르기 ·········· 99
이젠 다리살도 베어내고 ·········· 101
하늘의 도움으로 신인이 나타나니 ·········· 101
호랑이 나타나고 샘물도 솟고 ·········· 102
목숨을 바쳐야 사는 여자들 ·········· 103
왜적에게 도륙당한 형제 부부 ·········· 109
8. <칠원읍지>에 담긴 함안의 인물들 ·········· 113
고려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윤환 ·········· 113
서원을 최초로 세운 주세붕 ·········· 115
맑고 욕심 없었던 배세적 ·········· 119
충성 보상을 못 받아도 태연했던 주재성 ·········· 121
자신의 공적을 감춘 의병장 조방 ·········· 123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은 주시성 ·········· 125
역전의 용장 제말 장군 ·········· 127
제말 장군의 무덤을 찾아준 어사적 현감 ·········· 131
사랑의 화신 산돌 손양원 ·········· 133
마치면서 ·········· 138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흥미롭게도 칠원과 함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 나란히 등장합니다. 포상팔국 전쟁이 그것입니다. 칠포·골포·고사포(고자국)·보라국·사물국 등 바닷가의 여덟 나라가 포상팔국인데 그 군사들이 209년 또는 212년에 아라또는 가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21쪽. 가장 오랜 기록이 전하는 칠원과 함안)
경양대는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칠서취수장 자리의 강가 벼랑에 있습니다. 맞은편에서 보면 깎아지른 모습이 웅장합니다. 옛날에는 낙동강에서 첫손 꼽히는 명승이었는데 경’은 멋진 경치를 뜻하고 ‘양’은 좋은 술을 가리킵니다. 옛날 어른들이 여기 모여 자연을 즐기며 술을 마시곤 했던 모양입니다. <칠원읍지>에는 이곳에서 노닐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43쪽. <칠원읍지>에 담긴 자연)
사람들은 이런 무기연당을 두고 전남 담양군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조선 시대 정원이라고 얘기합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아름다운 전통 정원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50쪽. <칠원읍지>에 담긴 건축물)
선정비가 칠원읍 용산리 서남2길 10에 제법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23기입니다. <칠원읍지>에서 선정비가 세워졌다고 적힌 인물을 꼽았더니 모두 22명이었습니다.
선정비 중 글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빼고 <칠원읍지>에서 선정비를 세워준 사람을 찾아봤더니 4명이었습니다. 1659~1661년 현감을 지낸 이시배는 기록은 없지만 선정비는 있어서 이채롭습니다. 선정비가 칠원 만큼 많이 남은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71~72쪽. <칠원읍지>에 담긴 역사유적)
임진왜란이 막 끝난 1607년 1월 27~28일에 있었던 낙동강 뱃놀이는 참여한 인원만도 35명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유흥을 즐기는 자리가 아니라 민족 최대의 시련이었던 임진왜란을 이겨낸 위로와 자축의 모임이었습니다.
(77쪽. <칠원읍지>에 담긴 역사유적)
칠원현감과 함안군수의 봉급이 같았을까요? 아록위는 함안이 40결로 칠원보다 곱절이 많습니다. 반면 공수위는 함안과 칠원이 모두 15결로 똑같습니다. 땅과 인구가 함안이 넓고 많기 때문에 아록위는 차이가 나고, 수리할 건물과 대접할 관리의 숫자는 비슷해서 공수위가 같았는지, 그 기준을 어떻게 정했는지도 흥미롭습니다.
(88~89쪽. <칠원읍지>에 담긴 색다른 이야기들)
열녀의 길은 효자보다 한층 더 급수가 높습니다. 손가락 자르기는 기본이고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아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손가락을 잘랐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남편 이야기는 <칠원읍지>에 나오지 않아요. 그런 사례가 없었던 걸까요? 있었는데도 적지 않았을까요?
(103~104쪽. <칠원읍지>에 담긴 옛사람들의 효도와 절개)
이부익사는 ‘두 부인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뜻입니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편 주익창과 주필창은 뒤에 나오는 주세붕 선생의 셋째, 넷째 손자인데 이들 또한 왜적의 창칼에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한 집안에서 네 목숨이 도륙당했습니다. 그나마 이름이 있어 이렇게 기록으로 남았지만 왜적의 창칼에 무참히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112쪽. <칠원읍지>에 담긴 옛사람들의 효도와 절개)
“주세붕은 생전에 의복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고 고기도 좋은 고기는 먹지 않았으며 앉을 때는 털 방석에 앉지 않았고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으며 집도 빌려서 살았다. 봉급이 풍족했지만 입고 먹는 것 이외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19쪽. <칠원읍지>에 담긴 함안의 인물들)
“저놈에게 당장 곤장을 쳐라”며 다짜고짜 윽박지르는 조선시대 원님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 우리는 그게 조금 장난스럽다 여기면서도 실제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알고 보니 원님의 업무와 책임은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139쪽. 마치면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찾아주는 보람
<칠원읍지>가 건네는 교훈은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첫째 기록의 중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있었던 일이 없어지지만 기록으로 남기면 역사가 되지요.
또 하나는 옛날 사람들의 삶과 사연이 텔레비전 드라마나 이야기책에는 제멋대로이고 엉망인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고 가로세로로 치밀하게 짜여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지금 이만큼 잘 사는 게 어느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린 덕분에 지금 이렇게 가지와 잎이 무성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지금 보고 듣고 겪는 사소한 이야기들도 얼마든지 훌륭한 역사의 기록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는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지역 역사·문화 안내서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자라나는 어린 친구들이 경상남도 함안군 한켠에 자리 잡은 고장 칠원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주제어: 지역, 자연, 문화, 예술, 건축, 인물, 사회, 주세붕, 윤환, 주재성, 무기연당, 용화산하동범록, 칠원읍지, 함안, 함주지, 손양원, 제말, 경양대, 반구정, 칠원읍성, 홍포사, 칠원민란
분류: 역사, 지역, 문화
제목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펴낸날 2020년 11월 30일
가격 12,000원
무선제본 | 144쪽 | 148*210mm
ISBN 979-11-86351-32-1 (0380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지은이 김훤주
책 소개
<함주지>를 통해 알아보는 함안의 역사와 옛날 사람들의 삶
〈함주지〉는 우리 함안의 옛 모습을 담은 조선시대 책이랍니다.
인물과 역사, 건물과 유적, 시문과 설화에서부터 자연환경과특산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는 〈함주지〉라는 이름은 들어서 알고있지만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한 안내서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함주지〉 내용 가운데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중심으로 골라 옮겼습니다.
이 책을 통해 〈함주지〉에 대해 관심이 생긴 친구들은 좀 더 단계를 높여 접근을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가 함안에 사는 친구들이 함안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면 책을 엮은 보람이라 여기겠습니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환경전문기자로 일하며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펴낸 책으로는 〈따지고 뒤집기의 즐거움과 고달픔〉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경남의 숨은 매력〉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가 있습니다.
목차
들어가면서
1부. 우리는 어떻게 옛날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을까요?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과거를 알 수 있을까요?
조개무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고인돌이 무덤이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됐을까요?
귀한 유물이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글로 남겨진 기록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물건이나 글을 통해 모든 역사를 다 알 수 있을까요?
기록과 유물 중 어느 쪽이 역사를 이해하기 좋을까요?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배우는 역사는 어떤 한계가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기록유산은 얼마나 될까요?
옛날과 오늘날의 기록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옛날에는 어떻게 역사기록을 보관했을까요?
옛날과 오늘날 기록물 내용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2부. 〈함주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1. 〈함주지〉는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함주지〉 첫 부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함주지〉를 만든 한강 정구는 어떤 분일까요?
〈함주지〉를 함께 만든 사람들
〈함주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2. 〈함주지〉에 담긴 함안의 산천
함안이 반역의 땅이라고?
기우제 자리로 안성맞춤인 여항산
기우제는 비 올 때까지 지낸다
방어산에 석성과 장군당이 있었다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은 언제 알려졌을까?
낙동강은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남강은 어떻게 불렀을까?
용이 살았다는 아현연
함안천도 이름이 여러 가지였다?
함안읍성 우물이 마르지 않았던 까닭은
쌍안산이 백이산으로 바뀐 사연
그때도 감과 곶감이 특산물이었을까
3. 〈함주지〉에 담긴 함안의 건축물
백성들이 나서서 함안읍성을 쌓다
명당자리를 알아보고 지은 무진정
함안천에 동산정 낙동강에 합강정
미산 중턱에 원효암과 의상대
향교와 서원
지금은 없어진 역과 원
지금은 없어진 삼우대
4. 〈함주지〉에 담긴 함안의 역사유적
성산산성에 사람이 살았다
고분 숫자는 계속 늘고 있다
아라왕궁지
5. 〈함주지〉에 담겨 있는 색다르고 별난 대목
황새가 은혜를 갚다
죄인 아버지를 위해 몸을 던진 노아
유구국에서 들여온 물소를 방목했다
조선시대에 이미 공공의료가
험한 유배지는 어디였을까요?
멀고 먼 서울 가는 길
장날은 언제 생겼을까?
원님의 봉급은 얼마였을까?
원님들은 얼마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까?
소 두 마리로 사람 목숨을 구하고
옹기장이를 내기로 따왔다
6. 〈함주지〉에 담겨 있는 삶의 기록
귀한 물건은 부모님께 바치고
똥 맛보기는 기본
호랑이 이야기도 나오고
손가락 자르기, 효도의 결정판
때로 기적도 일어나고
죽은 남편만 바라보며 살았던 여자들
목숨을 바쳐야 사는 여자들
여자들에게 혹독했던 세월
흐뭇한 이야기
7. 〈함주지〉에 담겨 있는 함안의 인물들
이방실 장군
생육신 조려
고려 충신 조열
고려 충신 이오
고려 충신 조순
부모 위해 벼슬 그만둔 어변갑
북방을 개척한 날아다니는 장군 이호성
연산군의 폭정에 죽음으로 맞선 박한주
함안에서 으뜸가는 효자 이교
부자쌍절각 조준남과 조계선
목숨 바쳐 왜적에 맞선 조종도
왜란과 호란에 모두 출전한 박진영
빼어난 시인 박덕손
마치면서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기록과 유물 중 어느 쪽이 역사를 이해하기 좋을까요?
그렇다면 글을 통해 역사를 아는 것과 유물을 보면서 역사를짐작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좋을 것 같나요? 두 가지 다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유물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어서 굉장히 생생하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눈으로 보는 힘이 엄청납니다. 반면 기록으로 배우는 역사는 유물로 볼 수 없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를 짐작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1부 우리는 어떻게 옛날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을까요? 中 19쪽)
함안은 우리나라 일반 지형과 달리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습니다. 이런 남고북저 지형을 두고 함안을 반역의 고장이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임금이 있는 북쪽이 높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이는 지어낸 말일 뿐 사실과는 다릅니다. 〈함주지〉에는 오히려 남고북저가 뭐가 문제냐 하는 당당한 태도가 나옵니다.
“천지가 한 번 개벽하면서 강과 산이 벌써 정해져 있는데도 한 때 헛된 이름을 빌려 만고의 실제 형상을 어지럽히려 하니 풍수지리설이 그렇게 만들었다.” 실제 생긴 그대로 두면 되지 억지로 만들어 넣을 까닭이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오히려 함안은 충신이 많이 나온 고장이지요. 고려시대도 그랬고 조선시대도 그랬습니다. 조순, 조열, 조려, 이오 등 뒤에 가면 이 분들의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2부 〈함주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中 35쪽)
함안 하면 사람들은 말이산고분군을 떠올리지요. 그런데 무진정은 말이산고분군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해마다 사월초파일이 되면 낙화놀이가 벌어져 함안은 물론 주변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보통 정자는 산 좋고 물 좋은 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 출신 조삼이 지은 무진정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있지요.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그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데서 명당 자리를 찾아내 무진정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함주지〉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큰길가의 일개 거친 언덕이었고 또 이 고을에서 번화한 자리였다. 하늘이 숨겨둔 땅도 아니고 감추지도 않았다. 오가는 사람이 하루 천만 명이라도 이 경치 좋은 곳에 정자 세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선생이 한 번 보더니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정자를 이루었다. 옛 길을 옮기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으니 길가는 이들이 보고 신선이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정자의 경치는 다함(盡진)이 없고(無무) 선생의 즐거움 또한 다함이 없다. 다함이 없음이 모여 무진정 이름이 됐으니 선생의 명성도 더불어 함께 다함이 없다. 선생의 성함은 삼이고 자는 노숙인데 함안군 사람으로 참으로 후덕한 어른이다.”
(2부 〈함주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中 59~61쪽)
5일장이 처음 생긴 것은 1700년대 후반입니다.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1587년에 나온 〈함주지〉 1권은 물론 1740년대에 나온 전집에도 없다가 1840년대 나온 후집에 나타나는 데서도 5일장이 생긴 시기를 짐작할 수 있어요. 함안에서 가장 큰 가야장은 언제 생겼을까요? 전집은커녕 후집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생겼기 때문이지요. 1927년 6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신설했다는 기사가있어요. 가야장은 규모가 대단하지요. 〈함주지〉에 나오는 평림·방목·군북장은 쪼그라들고 있어요. 이 또한 시대의 흐름이 아닐까요.
(2부 〈함주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中 91~92쪽)
무진정 연못가 부자쌍절각은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기리는 비석입니다. 아버지 조준남은 임진왜란 때 조상 무덤을 파헤치는 왜적을 막지 못했다고 자결한 효자이고 아들 조계선은 정묘호란 때 평안도 의주에서 전사한 충신입니다. 비각 오른편 충노대갑지비는 조계선을 위해 전쟁터까지 따라갔다가 그 유품과 부음을 돌아와 전하고는 주인을 구하지 못해 면목이 없다며 강물에 빠져 죽은 노비 대갑을 기리는 비라고하네요.
조상의 무덤을 지키지 못했다고, 모시는 주인을 구하지 못했다고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지금 세상에서 보면 더없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런데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종을 위해 왜 비를 세웠을까요? 그 마음이 갸륵해서? 아마도 다른 종들에게도 너희들도 저렇게 주인에게 충성해라 그런 뜻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부자쌍절각에 비해 충노대갑지비는 많이 초라해 보입니다.
(2부 〈함주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中 132쪽)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학생들을 위한 읽기 쉬운 <함주지>
조선시대 책 <함주지>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삶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와 <함주지>가 만들어진 배경과 의의, 내용을 담았다. 학생들이 읽기 쉽도록 최대한 가볍게 풀어내어 이해하기 쉽게 전달 하였고 현재의 이야기를 보태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설을 덧붙였다.
책에 나오는 함안을 <함주지>를 읽고 아이들과 함께 탐방하며 옛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는것도 좋다.
주제어: 경남, 함안, 함주지
분류: 역사, 국내, 문화/역사기행, 국내도서>역사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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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
펴낸날 2020년 5월 25일
가격 20,000원
반양장본 | 300쪽 | 152*225mm
ISBN 979-11-86351-28-4 (0390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지은이 김훤주 조현열
책 소개
옛 군수가 기록한 함안의 역사 유산을 찾아서
부임지마다 기록을 남겼던 수령 오횡묵은 경남 함안군수로 재임하던 시절에도 <함안총쇄록>을 남겼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객관 정황에다 본인의 느낌까지 섞어가면서 수령의 하루하루를 기록하였다.
이 책은 오횡묵이 기록한 함안의 지형과 명소, 시설, 그리고 각종 모임과 행사가 이뤄진 장소를 일일이 답사하며 130년 전의 모습을 더듬었다.
책에 나오는 함안 곳곳을 탐방하며 조선시대 원님의 풍류와 행적, 당시 백성의 삶을 떠올려보기에도 좋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 출생
경남도민일보 갱상도문화학교추진단 단장
갱상도문화공동체 대표
*지은이: 조현열
1960년 경남 함안 출생
경남도민일보 자치행정2부 부장
목차
1.들어가면서
기록유산이 넘쳐나는 함안
제작에서 활용까지 기록의 달인 오횡묵
각본 없이 반전이 거듭되는 <함안총쇄록>
살아 움직이는 기록을 위하여
2.관아 건물과 공간의 재구성
군수 부임 행차
수령의 읍터 몸소 살펴보기
새 군수의 조영
3.함안 읍성의 130년 전 모습
무너지지 않은 지과정 남쪽 성벽
사라진 현교와 새로 생긴 서문
새뜻한 동문루, 남루한 남문루
올라가 즐겨 놀았던 남쪽 성곽
실무적으로 쓰인 동문
높다란 데 자리한 북장대
4.함안 읍성의 지금 모습은
그윽하고 포근한 마른해자
명문 각석도 눈에 띄고
산지는 성벽도 대체로 온전
대문 너머 담장으로 남은 남문~동문
연못 앞에 노거수 우뚝한 북쪽 성벽
가장 심각하게 망가진 구간은?
명문 각석 사라진 남문터 서쪽
해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산지 읍성부터 원형 회복을
5.성산산성
목간의 최대 보물창고
기적 같이 환생한 고려시대 연꽃
오횡묵의 기록과 유리건판 사진
일제도 관심 갖고 고적 지정
군수가 백성 골탕 먹인 자리
산성 가는 산길을 아무도 몰랐다니
옛날 군사요충을 이제는 새 랜드마크로
6.세시풍속 : 복날과 정월대보름
복날에 팥죽을 먹다
팥죽을 먹었던 까닭은
복날에는 곤드레만드레?
지금은 사라진 함안의 줄다리기
줄다리기 승패에 목숨을 걸다
달밤에 줄다리기를?
같은 풍물이라도 대접이 달라
7.세시풍속 : 섣달그믐과 봄
섣달그믐밤 뜬 눈으로 밤을 새다
관아에서 푸닥거리를 하다
섣달그믐밤에 귀신 묻는 놀이를
경남 오광대의 시원 매귀희
3월의 마지막 날 봄을 보내는 낭만적인 전춘
재인 놀음 보면서도 봄을 보내고
8.함안대군물
진을 치고 전투까지 연출하는 대군물
왕비 탄신 대군물은 흥청망청
천총의 몰골은 염라대왕도 웃을 정도
원님 덕에 나팔 불고
민폐가 염려되어 중지했던 대군물
우스우면서도 눈물겨운 장면들
함안대군물의 출현을 기다리며
9.자이선·연처초연, 되살려 내고픈 그때 그 명승지
갈라터진 돌등에 새겨진 전임 군수의 행적
황폐해진 경관을 새로 단장하다
높고 또 넓게 켜켜이 쌓인 바위
함께 어울리는 열린 광장
자이선의 숨은 흔적을 찾아서
심복이 새긴 일곱 글자도
아직 못 찾은 글자들
10. 입곡 숲안마을 연계 골짜기
옥사를 피하여 입곡마을로
대접이 좋았어도 마음은 불편하고
청희당에 머물다 옮겨간 모희재
바위에 새긴 연계 두 글자
세상 넘기 어려웠던 보릿고개
평범한 백성과 아름다운 인연도
오탁수로 질병을 다스리고
산천은 간 곳 없고 건물은 그대로
오탁수 자리도 확인되고
11.낙화놀이
성 위에 오르지 못한 첫 번째 사월초파일
자이선에서 맞은 세 번째 사월초파일
“붉기는 꽃 같고 밝기는 별 같다네”
장터와 읍성 말고도 불놀이를
새롭게 전승된 함안낙화놀이
지역 주민 스스로 이룩한 재연과 전승
12. 관노들의 파업
한 섬이 12말도 되고 8말도 되는 비결
10년 전 장부까지 조사하고
밥줄 끊어진 관노들의 파업
파업을 맞은 오횡묵의 대처는
파업에 숨은 배후가 있었으니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빗줄기 맞으며 엿새 동안 석고대죄
13. 군수의 파업
엄청나게 떼어먹은 조세
대책이 없는 조세를 받아들이려니
웃통 벗고 화살 맞기
마산창에서 걷은 한 해 조세
곤장 소리 가득한 납세 현장
질질 끄는 양반 vs 문을 닫는 군수
군수의 일관된 뚝심 vs 양반의 소소한 저항
생일날 깔끔한 마무리
함안 백성보다 착한 백성이 없다
14. 한 손에는 매 한 손 에는 꿀
형벌은 갈수록 고달프게
죄인에게도 꿀물을 내려주고
진휼에 스며든 부정을 뿌리 뽑고
개별 구휼은 장터가 안성맞춤
활쏘기 시합장도 나누는 자리로
능멸하고 깔보는 데는 단호하게
원님 코앞에서 벌어진 노름
15. 검암마을이 품은 자연과 인물
너른 들판에서 받은 상쾌한 첫인상
함안에서 처음 천렵을 누린 자리
동네가 크다 보니 인물도 나고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그 선조
여간 가깝지 않았던 이용순
고려에 의리를 다한 조순도 검암에
충순당 정려각과 조순 장군비
충순당의 고조부를 기리는 동산정
16. 가뭄 속 단 비 같았던 무진정
부임하는 날 보았던 무진정
주세붕의 눈에 비친 최초 모습
오횡묵이 본 달라진 무진정
무진정에서 보낸 즐거운 한때
권학을 위한 잔치를 무진정에서
군수 떠나가는 전별연도 무진정
봇짐장수 대회도 무진정에서
무진정은 무진정 이수정은 이수정
17.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한강 정구와 지역 선비들의 합작품 <함주지>
한강이 놀았던 별천계곡
오횡묵이 놀았던 별천계곡
시집도 묶어내고 글자도 새기고
한강을 기리는 다른 각자들
‘경현대’까지 더해져서
18. 사랑 독차지한 원효암·의상대
오횡묵이 치성을 들였던 자리
오횡묵의 눈에 비친 원효암·의상대
일반 백성들에게도 각별했던
함안에 하나뿐이었던 절간
원효암 주지스님은 허풍을 떨고
인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19. 기우제는 비 올 때 까지
어느 날 보니 문득 가뭄이
몰래 쓴 무덤부터 파내고
첫 기우제는 사직단에서
나머지 기우제는 영험이 있는 데서
자이선에서는 비공식 기우제를
마지막 기우제에 비는 제대로 내리고
빌지 않아도 내리는 비
그래도 고맙게 풍년이 들어
20. 기우제 지낸 자리 지금 모습은
기우제 효력은 신통찮았고
모두 어려울 때는 ‘고르게’가 최선
금품도 주면서 관폐 줄이기도
기우제 자리는 지금 어디일까
주물진은 풍탄 나루
기록 풍부한 벽사단(와룡정)
험하고 높은 여항산
21. 습지 정경 속 제방과 보
오횡묵이 그린 습지 경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마을 쪽에만 있었던 옛날 제방
함안천에 남아 있는 옛날 제방
함안읍성을 있게 만든 가칭 ‘금천방죽’
혹시 오횡묵이 고생했던 그 제방?
술과 북어와 담배를 풀며 보(湺) 공사도
22. 객사는 없어졌지만 향교는 남아
객사 전패에 부임 인사를 올리고
제사 지내는 제물을 살피던 자리
시나브로 없어진 파산관과 태평루
공자 알현은 부임 사흘째에
강학과 시험을 치르던 향교
한 달 두 차례 객사·향교 들러야 했던 오횡묵
여전한 은행나무 살아남은 대성전
23. 그때도 감·수박·연꽃이 명산이었을까
감은 그때도 함안 곳곳에
아래로 베풀고 위로 바치고
받을 때는 청렴을 생각하고
일제강점기에도 대단했던
함안 수박의 명성은?
함안에 연꽃이 없다고 했으나
네 가지 서양 채소도 기르고
24. 머물러 달라는 만인산
보내는 아쉬움 선정비
1만 명 이름을 수놓은 만인산
만인산 선물에 담긴 뜻은
선정비는 헤어지는 아쉬움을
오횡묵이 찾은 마지막 함안 명승
떠나는 원님인데도 군악 의장을
책 속으로
함안읍성은 1510년 경상도에서 삼포왜란이 터졌을 때 처음 쌓았고 1555년 전라도에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고쳐 쌓았다. 오횡묵이 함안군수를 지낸 때는 이로부터 330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읍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889년 4월 21일 부임 행로에 읍성이 나온다.
“(무진정 방향에서 오면) 지과정 오른편서쪽이 읍성이다. 북문은 오래 전에 무너졌고 지과정 남쪽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동문은 절반쯤 가운데 우뚝 섰는데 파동루(巴東樓)라는 현판이 달렸다. 성 위에 남녀가 빽빽하게 서서 구경하는데 사람성(人城)이라 할 만하였다. 남문 밖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곡성(曲城)으로 들어가니 파남루(巴南樓)현판이 걸렸다.”
(본문 30쪽)
합안읍성에서 산지는 상당한 정도로 원래 모습이 유지되고 있었다. 경관을 조금만 정비하고 관리하면 훌륭한 생태역사탐방자원으로 새로 태어날 것 같았다. 성벽과 해자 안팎을 무성하게 뒤덮은 수풀과 흙더미를 일단 걷어내는 것이다. 성산산성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석축도 느낌이 있었지만 마른해자가 특히 색달랐다.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유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이 왠지 좋았다. 성벽과 마른해자의 나란한 동행과 조화로움도 은근히 감흥을 일으켰다.
최헌섭 원장은 “지금 성벽은 100년 넘는 세월을 지나면서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수풀과 흙더미를 제거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며 “이렇게만 정리해도 곧바로 130년 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거리가 1킬로미터 안팎으로 적당하고 가파른 비탈도 없어서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길이다. 조금만 손질을 하면 느낌도 산뜻하고 역사유적도 누릴 수 있는 산책로 하나가 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본문 50~51쪽)
정월대보름에는 다른 세시풍속도 있었다. 으뜸은 예나 이제나 달맞이였다.
“달맞이영월지유(迎月之遊)는 없는 마을이 없다. 계수나무 그림자(계영桂影)가 동쪽에서 나오자 늙은 농부들이 서로 축하하며 모두 금년에는 반드시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1890. 1. 15)
“조금 뒤에 얼음처럼 맑고 차가운 달이 올라왔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원만하면서 짙은 황색이었다. 모두들 ‘근년에 정월대보름 달을 처음 보았으니 마땅히 제일 좋은 징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 해 전 정원대보름은 날이 흐렸었다. 그래서 달맞이를 할 수 없었다.
액을 쫓고 복을 부른다는 명목으로 정월대보름 전후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놀고 금품을 받는 일은 요즘에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마을 단위 모임이 주체인데 이렇게 모은 금품은 대개 공동 경비로 사용된다.
(본문 73~74쪽)
초파일 불놀이에서 등불이 먼저일까, 불꽃이 먼저일까?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종교행사로 시작되었으니 등불이 먼저다. 그러면 불꽃은 왜 생겨났을까? 등불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인지 아무래도 좀 밋밋하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면 색다르고 멋진 다른 것을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등불을 뛰어넘는 재미거리로 생겨난 불꽃이 이번에는 거리를 벗어나 산으로 올라가 고도를 높임으로써 또다른 차원으로 나아갔다. 오횡묵이 적은대로 나뭇가지와 바위절벽에 내걸려 바람이 부는 데 따라 흔들리며 빛났던 것이다. 지금 되살려 시도해보아도 좋을 새로운 경관의 창출이라 할 수 있겠다.
(본문 127쪽)
오횡묵보다 300년 가량 앞선 시기에 함안에서 군수를 지낸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라는 인물이 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모두에게서 배웠고 따로 한강 학파를 이룰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역대 함안군수 가운데 인품과 학문이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함안 사람들은 지금도 한강 정구를 많이 기억하고 높이 받들고 있다.
정구는 <함주지咸州誌>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1586~88년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지역 역량을 끌어모아 <함주지>를 편찬했던 것이다. 함안의 산천과 인물·문화·산물을 담은 <함주지>는 지금껏 남아 있는 우리나라 읍지(邑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본문 200쪽)
“가뭄이 두 달 동안 지루하게 이어지니 들판과 습지가 모두 벌겋게 타버렸고 …지금 농사 형편은 참혹하여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횡묵은 생각 이상으로 영리했다. 공문을 보내고 곧바로 “전공(前功)이 아깝고 인사(人事)를 다하지 않았으니 내가 또 따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였다. 아전들이 “명부(冥府)가 반응이 없을 수 있다”며 반대하는데도 “나는 할 뿐이고 하늘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느냐”며 밀어붙였다. 이런 계산이 있었지 싶다. ‘스무 날 넘게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비는 데 들인 공력이 헛수고가 되었으니 안타깝다. 달리 보면 그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니 이제 때가 되지 않았을까? 조금 더 빌면 비를 만날 수도 있겠구나. 내리지 않아도 손해는 아니지. 백성들한테 그만큼 애썼다는 인상은 심어줄 수 있으니.’
오횡묵은 이어 “경건하게 정성을 들이는 예식은 사람들이 함께해야 하니 내가 홀로 삼헌(三獻)을 하는 대신 다음은 재임이 다음은 공형이 하는 식으로 하자”고 하였다. 재임은 향교 임원이니 지역 양반들이고 공형은 삼반관속이므로 고을 아전들이다. 이는 제사에 세 번 술잔을 올리는 삼헌에서 초헌·아헌·종헌을 수령·양반·아전이 저마다 나누어서 하자는 얘기다. 수령 단독이 아니라 양반과 아전까지 공동으로 주관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다.
(본문 232~233쪽)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함안총쇄록’을 통해 알아본
조선시대 함안의 역사와 마을을 다스린 원님의 이야기.
부임지마다 기록을 남겼던 수령 오횡묵은 경남 함안군수로 재임하던 시절에도 <함안총쇄록>을 남겼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객관 정황에다 본인의 느낌까지 섞어가면서 수령의 하루하루를 기록하였다.
이 책은 오횡묵이 기록한 함안의 지형과 명소, 시설, 그리고 각종 모임과 행사가 이뤄진 장소를 일일이 답사하며 130년 전의 모습을 더듬었다.
왕조시대 이야기라 자칫 고루하지 않을까 싶지만 오히려 발랄하거나 발칙한 에피소드도 곳곳에 등장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만 끈질기게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줄 알았는데 130년 전에는 우리도 그랬다. 군수 오횡묵은 가뭄으로 논밭이 타들어 가자 하루걸러 한 번씩 한 달 동안 15차례 하늘에 빌었다.
군수도 파업하고 관노도 파업을 했다. 군수는 양반과 아전이 말을 듣지 않고 묵은 조세를 제대로 내지 않자 문을 닫아걸었다. 관노는 조세를 규정대로 줄이자 자기네 콩고물이 없어진다며 일손을 놓았다.
누정이나 명승을 찾아 시를 짓고 노닐었지만 단순히 놀이인 것만은 아니었다. 군수의 권위를 높이고 지역사회에 질서를 세우면서 학문도 권장하는 행정 행위였다. 그렇지만 무진정이 양반 전용 놀이터는 아니었다. 봇짐장수(褓商)들이 1000명 넘게 모여 대회를 연 적도 있다.
선물 받은 벌꿀과 딸기를 동헌에 있던 모든 아전·사령·손님은 물론 일반 백성과 죄인까지 고루 나누었다. 형틀에서 볼기짝이 드러난 상태에서도 기쁜 기색으로 이를 우물우물 삼키는 모습에 군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이렇듯 책은 조선시대 함안군수가 고을을 다스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금 함안 곳곳을 탐방하며 숨은 역사와 과거 모습을 독자의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제어: 함안, 함안총쇄록, 경남함안, 조선시대, 조선시대군수, 함안답사
분류: 역사, 국내, 문화/역사기행, 국내여행>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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