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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3

Date : 2023. 12. 15. 16:39 Category : 피플파워가 낸 책 Writer : 쏭이얌

 

 

 

 

한글세대를 위한 함안 금라전신록 산책

 

 

제목 한글세대를 위한 함안 금라전신록 산책

펴낸날 2023127

가격 16,000

반양장본 | 168152*225mm

ISBN 979-11-86351-63-5(0390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지은이 김훤주

 

 

 

 

 

책 소개

 

가슴에 새겨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금라전신록

 

금라전신록은 함안이라는 지역을 바탕 삼아 만든 저작물이다. 지역을 중심에 놓은 문집은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 통틀어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흘러가고 지역이 메말라가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금라전신록에 담겨 있는 옛사람들의 행적과 시문은 함안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행적들이 적지 않다. 가슴에 새겨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풍성하다.

지금 관점으로도 여전히 필요하고 뜻깊은 부분을 먼저 추렸다. 재해석이 가능하거나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만하거나 재미있게 읽힐 거리도 챙겼다.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하고 새롭게 의미를 더하면서 설명과 해설을 입히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 출생

1999~2023년 경남도민일보 기자

 

저서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경상권)>(비매품)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

<가야로 가야지-쉽고 재미있는 가야 역사>

 

 

목차

 

머리말_이 좋은 고전을 기억 너머로 보내지 않기 위하여

 

1장 인물

1. 어변갑의 뛰어난 글재주

2. 글솜씨는 뛰어났지만 불행했던 조욱

3. 단종을 위하여 숨어 살았던 조려

4. 조려의 후손은 벼슬을 하지 않았을까?

5. 그러면 고려 충신의 후손은 어떻게 했을까?

6. 2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

7. 옛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8. 용퇴가 왜 중요할까

9. 선물 받은 귀한 은어를 먹지 않은 이유는

10. 죽을 때 웃을 수 있다면

11. 유머 뒤에 우뚝했던 기개

12. 소년급제는 위험하다

13. 서울 조정에서 사투리를 썼다

14. 소귀에 경 읽기를 한 까닭은

15. 착한 사람은 자기보다 어려도 공경했다

 

2장 느낌과 생각

1. 비둘기 시

2. 달팽이 시

3. 낙방의 씁쓸함

4. 아들의 출세가 기쁜 까닭

5. 늙음을 노래함

6. 자식을 잃은 슬픔

7. 난리통에 고향 생각

8. 가야의 후예라는 뚜렷한 인식

9. 황은이 맞는 걸까?

10. 까마귀가 어리석나 사람이 어리석나

11. 언제나 좋은 물 이야기

 

3장 풍속

1. 천둥번개는 하늘의 경고였다

2. 옛날 결혼과 요즘 결혼은 무엇이 다를까

3. 지금과 달리 흔했던 처가살이

4. 부모님 봉양을 위해 외직을 한다

5. 친인척이 오자 벼슬 자리를 바꾸었다

6.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그만두었다

7. 부자간의 벼슬 바꿔치기

8. 이 정도는 아파야 벼슬을 그만두지

9. 부모 초상에는 몰골이 수척해야 했다

10. 그때도 극심했던 서울 중심주의

11. 배척되지 않는 불교, 까닭은?

 

4장 금라전신록

1. 금라전신록이란 무엇일까?

2. 금라전신록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3. 금라전신록을 왜 편찬했을까?

4. 금라전신록인쇄는 언제 되었을까?

5. 금라전신록에서 금라는 무엇일까?

6. 금라전신록을 편찬한 조임도는

7. 자료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8. 역적 김안로의 글을 전부 실은 까닭은

9. 묘갈명·묘비명·묘지·신도비명 등은 요즘으로 치면 무엇일까?

 

부록 : 금라전신록·하권 목차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바람이 세 차례 거세게 몰아치니 고기가 갑옷으로 변하는데 둘씩 짝을 지으려면 원래 실력이 어금버금해야 하지만그대 이름만 용문 위에 올라도 그만이지.”

이 시는금라전신록집현전 직제학 어변갑 행장에 들어 있다. ‘세 차례 몰아치는 바람은 세 번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과거 시험 절차를 비유한다. 다음에 나오는 고기()가 갑옷()으로 변한다()’는 한자로 쓰면 바로 어변갑(魚變甲)이 되고, 아래로 이어지는 내용은 바로 그 어변갑이 2등과 큰 격차를 보이며 1등 장원을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의 용문(龍門)은 과거 합격을 뜻한다. (본문 16)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 두렵고, 죽은 뒤의 세상을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렵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떨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다. 그래서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서도 의연했던 옛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성혼(1535~1598)이 친구 조감을 위해 쓴 앞의 묘갈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되새길 만한 내용이다.

죽고 사는 즈음에도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인품이 높고 삶을 대하는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힘쓰고 원한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

(본문 50)

 

동생 집의 불쌍한 비둘기

암컷은 새끼를 사랑하고 수컷은 암컷을 사랑하여

구구하는 것이 주인의 사랑에 보답하는 듯하구나

하루아침에 잇달아 고양이 입에 들어갔네

새장을 소홀히 했으니 누구의 잘못인가

고양이를 탓하겠나 비둘기를 탓하겠나

단속 제대로 못한 스스로를 탓해야지.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동물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둥지를 만들어주고 애지중지 기르던 비둘기가 고양이 먹이가 된 후 느꼈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난 시다.

어변갑이 쓴 이 시에서 구구 하는 것이 주인의 사랑에 보답하는 듯하구나라는 대목을 보면 비둘기를 기르면서 누리는 즐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금은 집에서 기르는 일이 드문 비둘기가 반려동물이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본문 66~67)

 

 

본문에 나오는 는 성혼(1535~1598)이라는 인물이다. 조감의 장인 백인걸을 스승으로 모시고 같은 집에서 다섯 살 많은 조감과 동문수학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적은 글이다.

성혼은 조정견의 아들 조감과 백인걸의 딸이 어떻게 해서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졌는지를 전해주고 있는데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딸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훌륭해서 며느리로 삼았다니 요즘 20~30대가 보면 깜짝 놀랄 일이다.

성혼의 아들과 조감의 딸이 맺어진 사연은 더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성별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양쪽 아버지의 결정만으로 결혼이 성사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데에는 시대 상황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결혼의 주체가 당사자 개인이 아니라 가문이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지금은 남자와 여자 개인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세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는 결혼이 갖는 의미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본문 104~105)

 

 

옛날에는 부모 초상이 나면 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삼년 동안 죽만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전복죽이나 잣죽 같은 영양이 풍부한 것 말고 쌀을 갈아서 만든 묽은 죽이었다. 몰골이 많이 수척해져야 초상을 제대로 치렀다는 인정을 받았고 본인 역시 도리를 다하려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과 마지막 떠나는 길에 예의를 다하고자 하는 심정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효도인지는 의문이다.

스승 장현광(1554~1637)이 제자 조임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되새겨볼 만하다. 그는 1622년 어머니 상중이던 조임도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자네의 상례가 중도를 넘어 견디기 힘들다고 들었네. 효성을 다하는 도리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몸을 잘 보존하는 한편으로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선조를 추모하는 일을 길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네.”(본문 124~125)

 

 

함안에는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이라는 책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인 1639년에 함안의 선비 조임도가 갖가지 자료를 모아 묶어낸 책이다. 책의 성격과 내용은 제목 금라전신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먼저 금라는 함안을 가리키는 옛날 별명이다.세종실록 지리지(1452)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그리고고려사(1454)에 이르기까지 아시량(阿尸良아나가야(阿那伽倻함주(咸州사라(沙羅)와 함께 소개되어 있는 별호이다.

전신록에서 은 전해 온다는 것이고 은 믿음직하다는 뜻이며 은 기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믿음직하게 전해져 오는 기록이 전신록이다. 금라까지 합하면 함안에 전해오는 믿을 만한 기록을 담은 책이금라전신록이다. (본문 136)

 

 

금라전신록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역을 중심에 놓고 여러 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주관에 휘둘리거나 감정에 치우쳐 아무 이유 없이 누구는 빼고 누구는 넣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지역사회로부터 곧바로 지적과 외면을 당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조임도는 원칙을 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해 취사선택을 했다. 서문에 나와 있는데 인물과 문장이 모두 귀중하면 당연히 싣고 인물은 훌륭하지 않아도 문장이 사랑스럽거나 문장은 뛰어나지 않으나 인물이 아까우면 채택했으며 또 인물을 버릴 수 없는 경우는 문장이 전해지지 않아도 그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당성, 어느 누구로부터도 틀렸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객관성, 과거와 당대의 훌륭한 인물과 문장을 남김없이 후세로 전달하는 효용성 셋을 두루 아울러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본문 139)

 

 

지역의 수령이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함안의 훌륭한 군수였고함주지의 편찬을 주도한 한강 정구를 보기로 들 수 있다. 그는 1586년 부임하자마자 사람을 시켜서 함안에 있는 훌륭한 인물들의 무덤을 찾아가 다듬도록 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제사까지 올렸다.

박한주는 연산군의 폭정에 충언을 아끼지 않다가 미움을 산 끝에 유배길에 올랐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자신보다 앞서 창녕군수를 지낸 선배인데다가 그 행적과 인품을 존경해서 그 무덤을 찾았다. 이밖에 이교·이원성·다물의 무덤도 찾아가 돌보고 다듬게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모두 효성이 지극한 효자들이었다.

정구의 이런 행보는 당연히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면서 새로 온 군수는 충성과 효도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소문도 나게 되고 새로 부임한 고을에서 깍듯하게 예우를 갖추는 예의 바른 인물이라는 평판도 얻을 수 있었다. 정구 군수에게 무덤 참배는 고을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본문 162)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좋은 고전을 기억 너머로

보내지 않기 위하여

 

함안이 기록의 고장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함주지·함안총쇄록과 더불어 손꼽히는 것이금라전신록이다.함주지는 수령과 지역 유지들이 함께 편찬한 읍지이고 함안총쇄록은 수령 개인이 기록한 일기이며금라전신록은 함안 출신 인물들의 훌륭한 행적과 뛰어난 시문을 한데 모은 책이다.

 

금라전신록에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행적들이 적지 않다. 가슴에 새겨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풍성하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금라전신록이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과금라전신록에 전해지는 여러 좋은 내용을 함께 알리는 것도 뜻깊은 일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문을 곧이곧대로 옮기기보다는 앞뒤 맥락을 감안하여 좀 더 알기 쉽도록 적절하게 가감첨삭했다. 한문체 특유의 산만하거나 늘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략한 대목도 적지 않다. 한자는 최대한 적게 쓰려고 했으며 특히 인명은 이나 선생으로 대신 부르는 것을 없애고 모두 이름 석 자로만 표기해 가독성을 높였다.

 

텔레비전 같은 대중 매체 덕분에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대중화되고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금라전신록에 담겨 있는 옛사람들의 행적과 시문은 함안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주제어: 함안, 역사, 풍속, 금라전신록, 함주지, 함안총쇄록

분류: 함안, 역사, 문화, 지역,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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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3. 5. 17. 17:11 Category : 피플파워가 낸 책 Writer : 쏭이얌

펴낸 날 : 20221227

가격 : 15,000

반양장본 | 231| 152×225mm

ISBN 979-11-86351-55-0 0391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www.idomin.com

 

저자 : 김훤주

 

 

 

책 소개

 

말이산고분군에서 6.25함안전투까지

핵심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요약정리

 

임진왜란 영웅 40여 명 대거 소환하고

칠원민란 처음 알리며 별천계곡 숨은 얘기 발굴도

 

함안의 역사에 관련된 책은 많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이나 6.25전쟁 함안 전투는 이미 여러 책에서 다루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물 역시 여기저기에 그들의 업적을 적어 놓은 글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하면 함안의 역사를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사건 가운데에는 잘 알려진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는 칠원민란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내용을 꼼꼼하게 다루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사건을 알리는 것으로도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6.25전쟁 함안 전투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6.25 때 함안에서 그런 전투가 있었다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함안에서 그런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과정을 쉽게 소개하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인물 편에서는 그들의 활약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별로 구분해서 좀 더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인물은 가장 가까운 근대 역사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공감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밖에도 함안을 두고 기록의 고장이라고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는 내용과 지금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 가는 명소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이런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기록의 고장 함안이라는 명성을 더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머리말에서

 

작가 소개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출판국장과 환경전문기자로 일하며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함안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쓰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가 그것입니다. 이밖에 펴낸 책으로는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경상권)(비매품)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등이 있습니다.

 

차례

 

머리말 7

 

 

1.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9

탁월한 입지 선정 12

오랜 기간 조성된 가야 대표 고분군 13

한반도 최초로 말갑옷이 나온 마갑총 14

메이드인아라가야말갑옷 16

금은 장식 고리자루큰칼도 18

계획에 따른 질서정연한 배치 19

아라가야의 순장은 언제부터 21

순장에도 공식이 있었을까 23

순장의 시작과 끝은 24

청동기문화와의 연관성 암각화고분 25

거대한 봉분의 숨은 비결 27

가장 높고 크고 기다란 고분은? 29

남문외고분군, 말이산고분군과 하나가 되다 30

아라가야를 잘 갈무리한 함안박물관 32

불꽃무늬가 새겨진 다양한 토기 34

멋진 산책이 함께하는 말이산고분군 38

 

2. 아라가야의 왕성이 있었던 가야리 유적 39

 

3.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 43

 

4. 신라가 쌓은 아라홍련의 고향 성산산성 47

가야가 쌓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49

신라 목간이 출토된 성산산성 50

700년 잠에서 깨어난 아라홍련 52

5. 고려 시대의 역사 인물 55

홍건적을 물리친 이방실 장군(1298~1362) 57

일찍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윤환(1303~1386) 66

고려 충신 이오 68

고려 충신 조열 71

고려 충신 조순 73

 

6. 조선 시대의 역사 인물 75

생육신 어계 조려 77

용퇴하고 무진정을 지은 조삼 80

서원을 최초로 세운 주세붕 83

주재성과 무기연당 87

 

7. 임진왜란 영웅들 95

김언수| 박제인| 박진영| 방흥| 안민| 안신갑| 안황| 안희| 오운| 유숭인| 윤탁연| 이간·이희 형제| 이령| 이만성| 이명호와 동생들| 이숙| 이정| 이집·이분형| 이칭| 이휴복| 정구룡| 제말| 조민도| 조방| 조붕| 조신도| 조응도| 조종도| 조탄| 차천홍·차억세| 황경헌| 동래할멈| 조준남·조계선부자| 주익창·주필창 형제부부

 

8.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 151

전란을 이겨낸 위로와 자축의 모임 153

미래세대까지 함께한 자리 157

지금도 이어지는 그날의 모임 159

 

9. 칠원에도 민란이 있었다? 161

 

10. 일제에 맞선 함안의 인물들 165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은 주시성 167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대암 이태준 168

사랑의 독립운동가 산돌 손양원 173

노령에도 만세시위에 앞장선 안지호 의사 176

일제 경찰을 응징한 조삼귀 여사 179

 

11. 경남 최초 최대였던 함안의 3.1만세운동 183

경남 최초 칠북 연개장터의거 185

두 차례 벌어진 대산면 평림 의거 187

칠북면 이룡 의거 187

3000명에 이른 함안읍 의거 188

함안에서 가장 큰 군북 의거 190

네 차례 시위를 벌인 칠원 의거 191

군북공립보통학교 항일시위 192

법수면민 항일시위 193

 

12.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1950년 함안 전투 195

섬진강을 넘어온 북한군의 기습 197

함안 서부 산악 지대 전투 199

함안 동부 평야 지대 전투 201

마무리는 소규모 근접전으로 203

 

13. 기록의 고장 함안 205

가장 오래된 읍지 함주지207

유일한 지역 문학·인물사전금라전신록213

조선 후기 함안의 풍물을 담은 함안총쇄록216

 

14.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명승지 221

후배 군수들도 즐겨 찾은 자리 223

곳곳에 한강 정구의 자취가 226

후배 군수도 흔적을 남겼고 228

한강을 기리는 뒷사람들의 자취도 230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30년 전 당시에는 동북아시아 전체에서도 이런 실물은 귀한 것이었고, 한반도에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나타난 것은 함안이 최초였습니다. 앞서 경주·동래·합천 등에서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물고기 비늘 모양의 작은 쇳조각이 출토된 적이 있었는데, 마갑총에서 원형에 가까운 말갑옷이 출토되면서 그것들이 말갑옷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갑총 말갑옷은 이런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지금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6,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순장이 없어지는 과정도 차이가 납니다. 가락국은 지배계층이 무너지면서 순장이 줄어들고 사라졌습니다. 순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서기 400년 침공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반면 아라가야는 지배계층이 건재하고 커다란 고분은 계속 지어지는데도 6세기 초반에 순장이 축소·소멸되었습니다. 순장할 능력은 그대로였지만 해당 지역 공동체에서 순장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갈수록 옅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왕성에 걸맞은 커다란 규모의 취사 전용 건물터도 확인됐습니다. 길이 11m와 너비 5m에 이르는 기다란 네모꼴인데 암반을 파내어 만들었습니다. 취사 공간임을 알려주는 아궁이와 구들·굴뚝, 물을 담아둘 수 있도록 암반을 파서 만든 구덩이, 그리고 취사용 토기와 그릇받침도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42, 아라가야의 왕성이 있었던 가야리 유적)

 

당산유적은 2004년 발굴에서 확인됐는데 우리나라에서 고대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던 가장 큰 자리입니다. 전체 길이는 40m이고 너비는 최대 15m에 이르며 면적은 최소한 130(400) 이상입니다.

202010월 충남 부여에서 발견돼 눈길을 끌었던 사비 백제의 대형 건물지가 가로 12m 세로 7m인 데 견주면 엄청난 크기이고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45,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금세 탁 트인 산성이 나옵니다. 무성했던 숲을 다듬어 만든 둘레길은 가볍게 산책하기에 그만입니다. 굽이마다 멋진 나무들이 보기 좋게 들어서 있습니다. 평상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거리낌 없이 펼쳐지는 함안의 풍경도 일품입니다. 여러 시대의 역사와 유물이 어우러져 있는 성산산성은 이제 가벼운 걸음으로 한 바퀴 둘러보는 즐거움도 갖추고 있습니다.

(53, 신라가 쌓은 아라홍련의 고향 성산산성)

 

돌아와 칠원에 있을 때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 되자 윤환은 재산을 풀어 그들을 구제했다. 또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물을 빌려주고 받은 증서는 모두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윤환은 700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곡식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빌려간 이들의 빚까지 탕감해 주었던 것입니다.

(67, 고려시대의 역사인물)

 

주세붕이라는 인물을 역사에서 크게 치는 이유는 서원의 설립으로 여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교육제도가 생겨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전에는 교육기관이 나라에서 고을마다 하나씩 세운 향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고 싶어도 향교 말고는 갈 데가 없어 그만큼 교육의 기회가 적었습니다. 소수서원이 생기면서 전국 모든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서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를 높게 평가하는 기록이 명종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서원이 옛날에는 없었다. 서원의 설치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는 실로 커다란 결점이었다. 주세붕이 여기에 뜻을 두고 사람들의 비웃고 헐뜯는 것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니 옛 군자보다 공적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84, 조선시대의 역사인물)

 

무기연당은 전남 담양군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조선 시대 정원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아름다운 전통 정원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재성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운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대신 이렇게 그럴듯한 정원을 꾸며놓고 유유자적 살았다는 것이 더 훌륭할 수도 있습니다.

(92~93, 조선시대의 역사인물)

 

임진왜란이 끝난 지 4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나 책을 통해서 임진왜란을 경험하다 보니 승전의 장면에 열광하고 두드러진 몇몇 영웅들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 기리고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97, 임진왜란 영웅들)

 

1606년 봄 조선 사신이 화친을 하고 돌아올 때 왜가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냈는데 동래 할멈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할멈은 늙은 어머니가 있었는데 난리를 만나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돌아와서 어머니를 찾았더니 할멈과 마찬가지로 왜국으로 잡혀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왜국에 10년 동안 있었는데도 서로 그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던 겁니다. 할멈은 친족들에게 어머니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다시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갔습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다 마침내 어머니와 만나게 됩니다.

(142, 임진왜란 영웅들)

 

뱃놀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022년 함안박물관에서 관련 자료를 확보했는데, 이 가운데 해방 이후를 보면 이렇습니다. 함안을 중심으로 낙강동범계라는 모임이 19557월 합강정에서 총회를 하고 조직되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낙동강 뱃놀이를 이어간 이들의 이름과 시를 담은 낙강동범 계안 부 시집을 보면 이들의 뱃놀이는 19577(낙동강)19607(정암강) 등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여기서도 1607년 임진왜란 영웅들의 유쾌한 뱃놀이는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159~160,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

 

고종실록에 따르면 수천 명이 모였다고 했는데 당시로서는 칠원에 사는 거의 모두가 결집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비록 일시적이었다 해도 대단한 규모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칠원민란은 그 이상 구체적으로 밝혀진 부분이 거의 없어서 연구·조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64, 칠원에도 민란이 있었다?)

 

조삼귀 여사는 재판과정에서 내 남편과 내 나라의 원수를 갚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어린 아들은 그새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후 한 점 혈육 없이 외롭게 살다가 1948415일 세상을 떠났는데 가야읍 관음사 입구에서 말이산고분군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위쪽 왼편에 그 열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81, 일제에 맞선 함안의 인물들)

 

1932년에는 군북공립보통학교에서 31독립만세운동 13주년을 맞아 6학년 학생들이 항일시위를 실행했습니다. 229일 정오 4~6학년 대부분과 1~3학년 일부 등 280여 명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학교를 나와 미리 준비한 전단을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습니다. 장날을 맞아 북적이는 군북시장을 거쳐 군북공원에서 만세삼창을 한 다음 군북역을 지나 신창학교 운동장에서 해산했습니다.

전단에는 조선어 시간을 6시간으로 환원하라, 조선 역사 시간을 배정하라, 식민지 교육과 노역을 금지하라, 학교생활에 자치권을 달라, 나카미츠 교장과 이점용 훈도는 물러가라는 요구 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192~193, 경남 최초 최대였던 함안의 3.1만세운동)

 

북한군 제6사단은 724~25일 목포와 여수를 점령해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 28일 섬진강을 건너 하동에 집결하더니 29일 아침 마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이 31일 진주에 이를 때까지 북한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낙동강 방어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미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습니다.

(198,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1950년 함안전투)

 

함안읍지칠원읍지가 있는데 이것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

류의 것들은 조선 말기 중앙 조정의 방침에 따라 만든 것으로 다른 지역에도 이와 비슷한 읍지는 제법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넘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기록 유산이 함안에는 무려 세 가지나 됩니다. 함주지, 금라전신록, 함안총쇄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풍성한 기록물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함안으로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207, 기록의 고장 함안)

 

오횡묵은 함안총쇄록에서 이 양천을 두고 선생이 명명했다고 적었습니다. 여기 선생은 두말할 것 없이 한강 정구를 가리킵니다. 정구가 지은 양천은 지금 별천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국어학자들은 음운 변화의 결과로 설명합니다. 양천이 우리말로는 볕+내인

데 이 볕내가 자음접변 때문에 변내 또는 별내로 소리나는 것을 다시 한자로 고정시켜 별천(別川)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입니다.

(227,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명승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함안 역사·인물의 보편적인 내용 다루면서도

칠원민란 등 첫 소개, 임진왜란 영웅 중점 발굴,

지금껏 이어지는 낙동강 뱃놀이의 연원도 밝혀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은 말이산고분군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문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함안 역사의 첫머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지금 함안의 정체성도 여기에 기댄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이산고분군과 이어지는 가야리유적·당산유적, 성산산성 등은 최근까지 이뤄진 학계의 연구와 발굴 성과를 최대한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산고분군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만큼 개별 고분보다는 전체적인 모습과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중요한 고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다른 가야 이야기를 곁들여 아라가야를 좀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분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시대마다 달라지는 특징적인 내용도 두루 담으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의 함안이 1500년 전 아라가야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더듬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말이산고분군은 왕궁이 있었던 가야리유적이나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과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최대의 위기를 맞아 함안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고 어떻게 맞섰는지를 최대한 풍부하게 담은 것도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의 특징 가운데 한입니다. 남겨진 기록이 많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기록이 한 줄밖에 되지 않더라도 찾고 살려서 적었습니다. 덕분에 마흔이 넘는 분을 임진왜란 영웅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숨겨진 임진왜란 영웅들은 지금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일은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통쾌한 승리의 역사와 빛나는 영웅들만 나라를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꺼이 나섰던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영웅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에 얽힌 얘기도 있습니다. 16071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한강 정구 함안군수 박충후 등 35명이 함안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함께 어울렸습니다. 전란 직후 전란을 몸소 겪은 이들이 벌인 위로 자축의 뱃놀이였습니다.

당대에 이미 이름이 높았던 이들이 참여하고 중심이 됐던 모임인지라 오랫동안 그 영향력이 이어졌습니다. 1600~1800년대는 물론이고 20세기 들어선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에도 그들을 기리는 뱃놀이가 계속되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당시 뱃놀이에 참여한 35명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칠원민란은 아마 함안·칠원에 관련된 역사 서술 가운데 최초이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등 여러 기록을 나름대로 찾기는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학계의 연구도 전혀 없다시피 해서 참고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찾아진 만큼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19506.25전쟁 초기 함안전투도 여태까지는 전투 그 자체의 치열함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에서는 당시 그렇게 치열하게 함안전투가 벌어진 배경과 함안전투 승전이 전체 국면에 끼친 영향을 알기 쉽게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밖에 말미에는 함안이 기록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도 한 꼭지 다루고 최소한 430년 전부터 선조들의 놀이 문화가 겹겹이 쌓여온 별천계곡에 대한 이야기도 따로 떼어 적었습니다. 다들 한 번은 눈길을 줄 만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주제어 : 지역, 함안, 칠원, 말이산고분군, 역사 인물, 문화, 임진왜란, 고려동, 생육신, 성산산성, 일제강점기, 함안전투, 갓뎀산

 

분류: 함안, 역사, 문화, 지역,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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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3. 5. 16. 14:55 Category : 카테고리 없음 Writer : 쏭이얌

펴낸 날 : 20221110

가격 : 15,000

반양장본 | 247| 152×225mm

ISBN 979-11-86351-53-6 0391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www.idomin.com

 

저자 : 전점석

jjseuk@hanmail.net

 

 

 

 

책 소개

 

가고파의 시인은 진정 무엇을 추구했을까?

 

친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보이는

노산 이은상의 이중성은

상상을 훌쩍 뛰어넘은 수준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했던 노산의 작품이 기교에만 능하고 진실을 외면한 글이 아니길 바라면서 마산에 있는 가고파시비 순례를 시작했다.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이은상 인물 탐구는 흥미진진하였다. 그를 통하여 김성숙, 정인보, 이윤재, 안확, 최남선, 이광수, 조지훈, 안기영, 현제명, 홍난파, 김동진, 박태준, 윤이상 등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쓸 때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종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횡적으로 노산이 관계 맺은 인물들이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았다. 노산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은 환산 이윤재이고, 해방 후의 어려운 시절에 감싸주신 분은 운암 김성숙이다. 이 두 분은 별도로 정리했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이선근, 윤치영과 각별한 관계였다. 이분들과는 체제 내에 적극 참여한 것은 같았으나 그 방식은 서로 달랐다. 일제강점기의 눈부신 활동에서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했으나 그들과도 다르다.

성장 과정과 학생 시절, 일본 유학 생활과 가족관계를 제외하고는 어지간히 살펴보았다. 집필은 충무공, 조선어학회, 친일문제, 국토순례, 대통령과의 관계, 시조, 비문, 노래 그리고 단체 활동 등 아홉 분야로 나누어서 작성했다. 해방 후에 초점을 맞추어 대통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책을 펴내는 이유는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친일과 항일을 구분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을 노산은 추구하였다. 그 해답을 다른 곳이 아니라 노산, 스스로에게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작품은 아름답고, 독재 부역은 사실이기 때문에 각각 떼어놓은 상태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과 독재 부역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훌륭한 시조시인이며 청년운동가인 노산이 독재 부역을 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책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너무 노산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분도 있을 거고, 지나치게 좋은 점을 강조한다는 분도 있을 수 있다. 글쓴이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모두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산의 이중성은 일반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좋은 건 좋다 하고, 나쁜 건 나쁘다고 한다는 원칙이다. 글쓰기는 가치판단과 감정을 가능한 자제하고 사실만을 나열하고자 했다. 이 책은 글쓴이의 독창적인 저서라기보다 기존의 연구 문헌에 의지하면서 노산이 저서를 통해 직접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아무쪼록 이 책이 문학, 문학인과 권력의 바람직한 관계를 생각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되기를 바란다. -서문에서

 

 

 

 

 

 

저자 소개

 

전점석

 

우산(愚山). 1951년 대구 출생. 31년간 몸담았던 YMCA를 퇴직한 후에 20118월부터 경남일보 칼럼 경일포럼을 매월 게재하고 있으며 2018년 수필 이름짓기가 한국작가 제55회 신인작품상을 수상했다. 20205월 뉴스통신진흥회가 주최한 제2회 탐사·심층·르포 취재물 공모에 친일·반공·독재, 그 계보의 변신을 추적한다가 가작으로 입선했다. 인물추적 이은상피플파워201712월호부터 201912월호까지 2년간 게재했다. 거창민간인학살사건거창한들신문2019620일부터 6, 제주4·3학살의 박진경 대령에 대해 남해시대2020521일부터 3회 연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기억과 기록201912월호에 5·18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광주전남작가회의의 작가2020년 제26호에 1980년의 광주 상무대와 대구 50사단 헌병대,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회보20201월 통권 606호에 80년대 신문을 오려 붙여서 복사하는 교회 청년들, 20204월호에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경남도민일보 202228일자에 해안의용군과 해상인민군사건을 게재했다. 20178월 칼럼 분야 회원으로 경남작가회의에, 20194월 한국작가회의에, 201911월 진해문인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20201010일 아름나라가 시행하는 세 번째 아름나라문화상, 2021년 경남민예총 공로상 받았다.

지은 책은 일할 때도 주인, 일하고 나서도 주인(1988), 진주에서 지역운동하기(2002), 창원에서 지역운동하기 1, 2(2011), 친환경 건축이 지구를 살린다(2013), 지속가능한 지역사회(2015), 진해근대문화유산의 재발견(2018). 엮은 책은 인간답게 살자(1985), 자유 상상의 나래를 펴라(2017).

 

 

목차

 

가고파에서 새길론까지 9

 

1. 가고파를 사랑하는 마산시민 15

마산 시내에 있는 가고파시비를 찾아서 17

신중현과 베토벤은 음악만 할 줄 알았던 게 아니다 25

시의 거리에서 맑은 영혼을 담은 시를 만나고 싶다 27

 

2. 한국청년운동협의회 활동과 가고파시비보존결의대회 31

1962, 첫 번째 휴전선 종주를 다녀와서 31

청우회 중앙본부 제2~10대 회장으로 17년간 활동 35

반탁, 반공투쟁으로 8개 청년단체들이 모인 대한청년단 40

1963, 10년 만에 청우회로 부활 44

가고파시비 보존 결의대회의 후원단체인 건국회 46

 

3. 해방 직후 광양건준 부위원장, 호남신문 사장 49

이은상, 광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 49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최흥종 위원장, 전남인민위원회 박준규 위원장 52

미군정으로부터 호남신문 관리권을 받은 사장 박준규, 부사장 이은상 56

이은상 사장 취임 이후 친미 성향으로 돌아선 호남신문 59

 

4. 한독당 전남도당 위원장, 여순사건 김지회 신원보증 63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강사로 참여 64

여순사건과 한독당 계열의 오동기, 송욱, 이은상 66

여순사건 신원보증문제로 물러난 이은상의 서울, 부산 생활 71

6·25전쟁이 끝난 후 호남신문의 재건을 위해 노력 74

국립 전남대학교 후원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77

 

5. 이승만 단독정부 반대, 민주공화당 입당 거절한 운암 81

바위처럼 서 있는 운암 김성숙을 존경하는 노산 81

운암을 향한 추모시, 추도사와 묘비문, 묘비명도 작성한 노산 86

운암은 민주공화당 입당을 거절, 노산은 창당선언문을 작성 88

지조보다 중요한 노산의 새길론과 강력한 지도자론’ 91

 

6. 이승만 대통령 후보 지지와 4·19학생혁명기념탑 비문 93

이순신 같은 분이라고 이승만 대통령 후보 지지 유세 94

조지훈의 지조론과 천관우의 노산에 대한 실망 98

4·19정신을 계승했다는 박정희 장군에 의해 기념탑 건립 103

피 끓는 젊은이를 노래한 노산의 학생의 노래106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노산이 쓴 조사를 대독 108

 

7. 이승만 대통령, 김구 주석과 노산 이은상 111

시조 목이 그만 멘다와 헌수송 송가(頌歌)113

계속 대통령 하려고 사사오입 개헌한 이승만을 찬양 117

백범 조가(弔歌) 1949, 백범 추모시조 1950119

3·15를 불상사라고 한 노산 121

 

8. 피어린 六百里, 1962년 첫 번째 휴전선 종주 125

휴전선이 국경선으로 굳어져 가는 600128

휴전선을 다녀온 후 청년운동에 앞장서다 134

노산이 생각하는 분단의 원인과 분단극복 방안 136

 

9. 기원, 1980년 두 번째 휴전선 종주 143

평화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반공청년운동에 매진 145

굳어져 가는 휴전선을 찾은 두 번째 종주 146

이승만 시절 평화통일은 위험한 용공사상 147

평화통일을 말할 수 없던 시절의 북진통일 149

 

10.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현충사를 성역화 153

노산은 충무공기념사업회 1955~61, 1972~82년 회장 153

현충사는 성역화, 탄신일은 국가기념일 157

박정희 역사관은 식민사관에서 이순신의 신격화로 161

박정희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해놓은 인물 166

 

11. 신사임당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169

사임당과 율곡의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렸다 170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171

무려 6판을 거듭한 사임당과 율곡173

 

12. 영남대학교 설립은 이은상과 이후락의 작품 177

무리한 시설투자로 경영난에 봉착한 청구대학 177

조윤제는 학교문제를 정치권력에게 가져갔다고 힐책 179

같은 날, 각 이사회가 합병을 결의하고, 합동이사회 열어 최종 의결 181

영남대 교가는 이은상과 김동진의 작품 185

 

13. 대통령의 입각 권유를 거부한 사람들 189

3선 개헌을 앞둔 1968, 국민교육헌장 제정 작업에도 참여 189

입각 권유를 거부한 게 유신시대에 저항(?) 194

앞장서서 유신과 유신정권을 찬양한 노산과 문인들 196

1인 독재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어둠을 밝힌 문인들 198

한글전용정책 수립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활동 200

 

14. 비통한 심정으로 쓴 박정희 대통령 묘비문 205

비통함과 존경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 비문과 조가 205

30년 친구 박정희를 위한 시인 구상의 진혼시 209

똑같이 충무공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212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초안 작성 215

노산이 선택한 언론, 교육, 문화 국민운동 218

 

15.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 노산 223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경하하였다 223

이선근, 조병화, 서정주, 김춘수, 이병주, 천금성 225

불과 15개월이었던 국정자문회의 위원 229

 

16. 1947년 대도론과 1961년 새길론 235

노산이 노래하지 않은 강과 산이 없을 정도 235

노산은 대도론에서 좌우익의 폭력을 염려했다 238

친일과 항일을 구별하지 말자는 노산의 새길론240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웠다는 새길론243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서는 독재자를 옹호하는 이중성 245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노산의 시비를 돝섬 이외는 모두 둘러보고서 느낀 점은 정말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노산 특히 가고파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2개를 제외하고 모두 노산이 돌아가신 후에 세워진 것이다. 만약 노산이 이렇게 많은 시비가 세워져 있다는 걸 아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분명 고마워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실 것 같다. 마산 시민들이 자신에게 과분한 사랑을 준다시며 불의에 저항한 3·15를 불상사라고 한 것을 이해해달라고 하실 것 같다.

(27, 시의 거리에서 맑은 영혼을 담은 시를 만나고 싶다)

 

청우회는 박정희 정권의 반공정책을 지지하는 민간단체로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을 때마다 정권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산은 제2~10대 회장을 연임하면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7년간 활동하였다. 역대 16명의 회장 중에서 가장 오래 활동하였다. 1975년에는 단체 명칭을 한국청년운동협의회로 바꾸었으며 제1회 반공청년운동 순국자 합동추념제를 시작했다. 이후 건국청년운동협의회(1987), 대한민국건국회(1995)와 대한민국통일건국회(2017)로 이름을 바꾸었다.

(45~46, 1963, 10년 만에 청우회로 부활)

 

광양자치위원회 구성을 협의하고, 위원장 김완근, 부위원장 이은상, 정진무를 선출했다. 노산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임원 세 사람이 승낙을 받기 위해 노산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상임위원 24명 중에서 친일파 몇 명을 교체하자는 등의 수정 제안 몇 가지를 한 뒤 쾌히 승낙하였다고 한다. 노산은 비록 지역민은 아니지만 전국적인 명망가였기 때문에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50, 이은상, 광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

 

당시 서울에서는 이승만 정권 유지를 위한 반공이데올로기 담론의 형성에 문인들이 앞장서고 있었다. 19481227~28민족정신 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름이 오른 경남, 부산지역 문화인은 이은상을 위시해서 김달진, 김춘수, 김용호, 김상옥, 김용환, 김의환, 유치환, 유치진, 조연현, 최현배, 최인욱, 오종식, 정인섭, 손진태, 이광래, 이정호, 최영해, 오영수, 탁소성, 한형석, 허영균, 설창수 등이었다.

(72, 여순사건 신원보증문제로 물러난 이은상의 서울, 부산 생활)

 

일제강점의 암흑기에 달걀로 바위 치기보다 더 가망 없는 싸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떨쳐나섰다는 것을, 그들이 이름 없고, 빛나지도 않으면서 굶어 죽고, 맞아 죽어 가면서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운암을 보면서 노산은 절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87, 운암을 향한 추모시, 추도사와 묘비문, 묘비명도 작성한 노산)

 

판문점에서 벽제관에 이르는 지역에 관한 부분에서 냉전의식을 확실히 볼 수 있다.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배하여 도로 송도로 퇴각하는데 이때 조선의 이덕형이 진군을 주장했다는 내용은 맥아더의 북진론을 지지한 것이다. 벽제관에 관한 글에서 세 개의 다른 역사적 사례를 비교·소개하면서 맥아더의 북진론을 영웅적인 것으로 신화화했다.

(131, 휴전선이 국경선으로 굳어져 가는 600)

 

노산은 기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평화라고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평화는 전쟁 없는 평화가 아니었다. ‘총칼이 아름다운 강산을 더럽힌다는 표현으로 인해 노산이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것 같지만 그가 참여한 청년단체와 청년들에게 행한 연설을 보면 기본적으로 멸공과 북진통일을 이루어야만이 찾아오는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145, 평화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반공청년운동에 매진)

 

노산은 사임당과 율곡에서 사임당에 대해서는 효녀, 착한 아내, 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으며, 율곡에 대해서는 지방관이 되어 지방행정을 쇄신하는 모습을 그렸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국모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논리에 합당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정치적 목적이고, 노산은 민족문화 측면이라고 나누어 볼 수도 있다.

(174~175, 무려 6판을 거듭한 사임당과 율곡)

 

박정희 대통령은 이 충무공에 대해 남다른 존경심을 갖고 있던 노산을 찾게 되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밀해졌다. 노산은 평소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212~213, 똑같이 충무공을 존경하는 박정희와 이은상)

 

77세의 노산은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제목과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상이라는 부제로 글을 썼다. 직책은 민족문화협회 회장이었다. ‘10·26사태 이후 두어 차례나 위급한 고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앞에는 안팎으로 닥쳐오는 난관이 겹겹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모든 여론들이 한결같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223~224,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경하하였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문제적 문인 이은상을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책

 

뛰어난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은 언제나 논란이 따라다니는 문제적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시인임을 앞세우며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아무 잘못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승만에서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권력의 편에 서서 독재를 옹호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그의 문필 활동까지 지배자를 위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논의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은상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저마다 자기 관점에 맞추어 관련 사실에 대해 해석하면서 자기 얘기만 되풀이하고 마는 것이다.

지역에서 지역운동을 오랫동안 벌여온 전점석 작가의 <노산 이은상과 대통령>은 상반된 주장을 아우르는 한편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노산의 생애 전반을 빠짐없이 폭넓게 살펴봄으로서 그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에 이르고 있다.

해방 직후 전남 광양에 머물던 때부터 광주에서 신문사 사장을 하던 시절의 행적, 여순사건에서 보인 그의 태도는 널리 알려진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6.25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그의 정신세계와 이후 반공청년단체 회장 시절의 사상은 새로운 사실로 다가온다.

세종대왕 숭모 활동과 한글전용정책, 이순신 장군 영웅화와 아산 현충사 성역화 사업, 이율곡과 그 어머니 신사임당 선양 사업에 나선 행적도 크게 알려진 것은 아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새롭다. 전문 연구자들은 아는 일이라 해도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그렇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이은상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동시에 독재를 찬양했다. 어떤 사람들은 노산을 두고 소신도 줏대도 없이 자기 이해와 편의를 좇는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점석 작가에 따르면 이은상은 그런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노산 이은상의 이중성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이중성이 노산의 정신세계에서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아무 모순 없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공과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았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자라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노산 이은상을 비판하든 옹호하든, 전문 연구자이든 일반 애호가이든 그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고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 번 읽어 보시라고 권할 만한 책이다.

 

주제어: 지역, 마산, 가고파, 문화, 김성숙, 정인보, 이윤재, 안확, 최남선, 이광수, 현재명, 홍난파, 김동진, 박태준, 친일, 독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순신, 3.15, 4.19,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율곡, 휴전선

 

분류: 역사, 지역, 문학,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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