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 1
-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 1 2023.05.17
펴낸 날 : 2022년 12월 27일
가격 : 15,000원
반양장본 | 231쪽 | 152×225mm
ISBN 979-11-86351-55-0 0391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www.idomin.com
저자 : 김훤주
책 소개
말이산고분군에서 6.25함안전투까지
핵심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요약정리
임진왜란 영웅 40여 명 대거 소환하고
칠원민란 처음 알리며 별천계곡 숨은 얘기 발굴도
함안의 역사에 관련된 책은 많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이나 6.25전쟁 함안 전투는 이미 여러 책에서 다루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물 역시 여기저기에 그들의 업적을 적어 놓은 글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하면 함안의 역사를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사건 가운데에는 잘 알려진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는 칠원민란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내용을 꼼꼼하게 다루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사건을 알리는 것으로도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6.25전쟁 함안 전투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6.25 때 함안에서 그런 전투가 있었다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함안에서 그런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과정을 쉽게 소개하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인물 편에서는 그들의 활약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별로 구분해서 좀 더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인물은 가장 가까운 근대 역사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공감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밖에도 함안을 두고 기록의 고장이라고 하는 까닭을 알 수 있는 내용과 지금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 가는 명소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이런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기록의 고장 함안이라는 명성을 더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머리말에서
작가 소개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출판국장과 환경전문기자로 일하며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함안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쓰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와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가 그것입니다. 이밖에 펴낸 책으로는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경상권)』(비매품)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 등이 있습니다.
차례
머리말 7
1.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9
탁월한 입지 선정 12
오랜 기간 조성된 가야 대표 고분군 13
한반도 최초로 말갑옷이 나온 마갑총 14
‘메이드인아라가야’ 말갑옷 16
금은 장식 고리자루큰칼도 18
계획에 따른 질서정연한 배치 19
아라가야의 순장은 언제부터 21
순장에도 공식이 있었을까 23
순장의 시작과 끝은 24
청동기문화와의 연관성 암각화고분 25
거대한 봉분의 숨은 비결 27
가장 높고 크고 기다란 고분은? 29
남문외고분군, 말이산고분군과 하나가 되다 30
아라가야를 잘 갈무리한 함안박물관 32
불꽃무늬가 새겨진 다양한 토기 34
멋진 산책이 함께하는 말이산고분군 38
2. 아라가야의 왕성이 있었던 가야리 유적 39
3.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 43
4. 신라가 쌓은 아라홍련의 고향 성산산성 47
가야가 쌓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49
신라 목간이 출토된 성산산성 50
700년 잠에서 깨어난 아라홍련 52
5. 고려 시대의 역사 인물 55
홍건적을 물리친 이방실 장군(1298~1362) 57
일찍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윤환(1303~1386) 66
고려 충신 이오 68
고려 충신 조열 71
고려 충신 조순 73
6. 조선 시대의 역사 인물 75
생육신 어계 조려 77
용퇴하고 무진정을 지은 조삼 80
서원을 최초로 세운 주세붕 83
주재성과 무기연당 87
7. 임진왜란 영웅들 95
김언수| 박제인| 박진영| 방흥| 안민| 안신갑| 안황| 안희| 오운| 유숭인| 윤탁연| 이간·이희 형제| 이령| 이만성| 이명호와 동생들| 이숙| 이정| 이집·이분형| 이칭| 이휴복| 정구룡| 제말| 조민도| 조방| 조붕| 조신도| 조응도| 조종도| 조탄| 차천홍·차억세| 황경헌| 동래할멈| 조준남·조계선부자| 주익창·주필창 형제부부
8.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 151
전란을 이겨낸 위로와 자축의 모임 153
미래세대까지 함께한 자리 157
지금도 이어지는 그날의 모임 159
9. 칠원에도 민란이 있었다? 161
10. 일제에 맞선 함안의 인물들 165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은 주시성 167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대암 이태준 168
사랑의 독립운동가 산돌 손양원 173
노령에도 만세시위에 앞장선 안지호 의사 176
일제 경찰을 응징한 조삼귀 여사 179
11. 경남 최초 최대였던 함안의 3.1만세운동 183
경남 최초 칠북 연개장터의거 185
두 차례 벌어진 대산면 평림 의거 187
칠북면 이룡 의거 187
3000명에 이른 함안읍 의거 188
함안에서 가장 큰 군북 의거 190
네 차례 시위를 벌인 칠원 의거 191
군북공립보통학교 항일시위 192
법수면민 항일시위 193
12.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1950년 함안 전투 195
섬진강을 넘어온 북한군의 기습 197
함안 서부 산악 지대 전투 199
함안 동부 평야 지대 전투 201
마무리는 소규모 근접전으로 203
13. 기록의 고장 함안 205
가장 오래된 읍지 『함주지』 207
유일한 지역 문학·인물사전『금라전신록』 213
조선 후기 함안의 풍물을 담은 『함안총쇄록』 216
14.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명승지 221
후배 군수들도 즐겨 찾은 자리 223
곳곳에 한강 정구의 자취가 226
후배 군수도 흔적을 남겼고 228
한강을 기리는 뒷사람들의 자취도 230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30년 전 당시에는 동북아시아 전체에서도 이런 실물은 귀한 것이었고, 한반도에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나타난 것은 함안이 최초였습니다. 앞서 경주·동래·합천 등에서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물고기 비늘 모양의 작은 쇳조각이 출토된 적이 있었는데, 마갑총에서 원형에 가까운 말갑옷이 출토되면서 그것들이 말갑옷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갑총 말갑옷은 이런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지금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6쪽,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순장이 없어지는 과정도 차이가 납니다. 가락국은 지배계층이 무너지면서 순장이 줄어들고 사라졌습니다. 순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서기 400년 침공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반면 아라가야는 지배계층이 건재하고 커다란 고분은 계속 지어지는데도 6세기 초반에 순장이 축소·소멸되었습니다. 순장할 능력은 그대로였지만 해당 지역 공동체에서 순장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갈수록 옅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쪽, 함안 역사의 첫머리 말이산고분군)
왕성에 걸맞은 커다란 규모의 취사 전용 건물터도 확인됐습니다. 길이 11m와 너비 5m에 이르는 기다란 네모꼴인데 암반을 파내어 만들었습니다. 취사 공간임을 알려주는 아궁이와 구들·굴뚝, 물을 담아둘 수 있도록 암반을 파서 만든 구덩이, 그리고 취사용 토기와 그릇받침도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42쪽, 아라가야의 왕성이 있었던 가야리 유적)
당산유적은 2004년 발굴에서 확인됐는데 우리나라에서 고대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던 가장 큰 자리입니다. 전체 길이는 40m이고 너비는 최대 15m에 이르며 면적은 최소한 130평(400㎡) 이상입니다.
2020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발견돼 눈길을 끌었던 사비 백제의 대형 건물지가 가로 12m 세로 7m인 데 견주면 엄청난 크기이고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45쪽,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금세 탁 트인 산성이 나옵니다. 무성했던 숲을 다듬어 만든 둘레길은 가볍게 산책하기에 그만입니다. 굽이마다 멋진 나무들이 보기 좋게 들어서 있습니다. 평상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거리낌 없이 펼쳐지는 함안의 풍경도 일품입니다. 여러 시대의 역사와 유물이 어우러져 있는 성산산성은 이제 가벼운 걸음으로 한 바퀴 둘러보는 즐거움도 갖추고 있습니다.
(53쪽, 신라가 쌓은 아라홍련의 고향 성산산성)
“돌아와 칠원에 있을 때 크게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 되자 윤환은 재산을 풀어 그들을 구제했다. 또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물을 빌려주고 받은 증서는 모두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윤환은 700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곡식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빌려간 이들의 빚까지 탕감해 주었던 것입니다.
(67쪽, 고려시대의 역사인물)
주세붕이라는 인물을 역사에서 크게 치는 이유는 서원의 설립으로 여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교육제도가 생겨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전에는 교육기관이 나라에서 고을마다 하나씩 세운 향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하고 싶어도 향교 말고는 갈 데가 없어 그만큼 교육의 기회가 적었습니다. 소수서원이 생기면서 전국 모든 고을에서 이를 본받아 서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를 높게 평가하는 기록이 『명종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서원이 옛날에는 없었다. 서원의 설치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으니, 이는 실로 커다란 결점이었다. 주세붕이 여기에 뜻을 두고 사람들의 비웃고 헐뜯는 것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서원을 세웠으니 옛 군자보다 공적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84쪽, 조선시대의 역사인물)
무기연당은 전남 담양군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조선 시대 정원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아름다운 전통 정원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재성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공을 세운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대신 이렇게 그럴듯한 정원을 꾸며놓고 유유자적 살았다는 것이 더 훌륭할 수도 있습니다.
(92~93쪽, 조선시대의 역사인물)
임진왜란이 끝난 지 4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나 책을 통해서 임진왜란을 경험하다 보니 승전의 장면에 열광하고 두드러진 몇몇 영웅들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 기리고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97쪽, 임진왜란 영웅들)
1606년 봄 조선 사신이 화친을 하고 돌아올 때 왜가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냈는데 동래 할멈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할멈은 늙은 어머니가 있었는데 난리를 만나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돌아와서 어머니를 찾았더니 할멈과 마찬가지로 왜국으로 잡혀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왜국에 10년 동안 있었는데도 서로 그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던 겁니다. 할멈은 친족들에게 어머니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다시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갔습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다 마침내 어머니와 만나게 됩니다.
(142쪽, 임진왜란 영웅들)
뱃놀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2022년 함안박물관에서 관련 자료를 확보했는데, 이 가운데 해방 이후를 보면 이렇습니다. 함안을 중심으로 ‘낙강동범계’라는 모임이 1955년 7월 합강정에서 총회를 하고 조직되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낙동강 뱃놀이를 이어간 이들의 이름과 시를 담은 『낙강동범 계안 부 시집』을 보면 이들의 뱃놀이는 1957년 7월(낙동강)과 1960년 7월(정암강) 등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여기서도 1607년 임진왜란 영웅들의 유쾌한 뱃놀이는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159~160쪽,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
『고종실록』에 따르면 ‘수천 명’이 모였다고 했는데 당시로서는 칠원에 사는 거의 모두가 결집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비록 일시적이었다 해도 대단한 규모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칠원민란은 그 이상 구체적으로 밝혀진 부분이 거의 없어서 연구·조사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64쪽, 칠원에도 민란이 있었다?)
조삼귀 여사는 재판과정에서 “내 남편과 내 나라의 원수를 갚았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어린 아들은 그새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후 한 점 혈육 없이 외롭게 살다가 1948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는데 가야읍 관음사 입구에서 말이산고분군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위쪽 왼편에 그 열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81쪽, 일제에 맞선 함안의 인물들)
1932년에는 군북공립보통학교에서 3・1독립만세운동 13주년을 맞아 6학년 학생들이 항일시위를 실행했습니다. 2월 29일 정오 4~6학년 대부분과 1~3학년 일부 등 280여 명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학교를 나와 미리 준비한 전단을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습니다. 장날을 맞아 북적이는 군북시장을 거쳐 군북공원에서 만세삼창을 한 다음 군북역을 지나 신창학교 운동장에서 해산했습니다.
전단에는 ‘조선어 시간을 6시간으로 환원하라, 조선 역사 시간을 배정하라, 식민지 교육과 노역을 금지하라, 학교생활에 자치권을 달라, 나카미츠 교장과 이점용 훈도는 물러가라’는 요구 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192~193쪽, 경남 최초 최대였던 함안의 3.1만세운동)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24~25일 목포와 여수를 점령해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 28일 섬진강을 건너 하동에 집결하더니 29일 아침 마산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이 31일 진주에 이를 때까지 북한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낙동강 방어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미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습니다.
(198쪽,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1950년 함안전투)
『함안읍지』나 『칠원읍지』가 있는데 이것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
류의 것들은 조선 말기 중앙 조정의 방침에 따라 만든 것으로 다른 지역에도 이와 비슷한 읍지는 제법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넘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기록 유산이 함안에는 무려 세 가지나 됩니다. 『함주지』, 『금라전신록』, 『함안총쇄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풍성한 기록물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함안으로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207쪽, 기록의 고장 함안)
오횡묵은 『함안총쇄록』에서 이 양천을 두고 “선생이 명명했다”고 적었습니다. 여기 선생은 두말할 것 없이 한강 정구를 가리킵니다. 정구가 지은 양천은 지금 별천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국어학자들은 음운 변화의 결과로 설명합니다. 양천이 우리말로는 볕+내인
데 이 볕내가 자음접변 때문에 변내 또는 별내로 소리나는 것을 다시 한자로 고정시켜 별천(別川)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입니다.
(227쪽, 한강 정구 놀던 별천계곡 명승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함안 역사·인물의 보편적인 내용 다루면서도
칠원민란 등 첫 소개, 임진왜란 영웅 중점 발굴,
지금껏 이어지는 낙동강 뱃놀이의 연원도 밝혀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은 말이산고분군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문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함안 역사의 첫머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지금 함안의 정체성도 여기에 기댄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이산고분군과 이어지는 가야리유적·당산유적, 성산산성 등은 최근까지 이뤄진 학계의 연구와 발굴 성과를 최대한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산고분군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만큼 개별 고분보다는 전체적인 모습과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중요한 고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다른 가야 이야기를 곁들여 아라가야를 좀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분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시대마다 달라지는 특징적인 내용도 두루 담으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의 함안이 1500년 전 아라가야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더듬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말이산고분군은 왕궁이 있었던 가야리유적이나 국제회의가 열렸던 당산유적과 별개로 떨어져 있지 않고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최대의 위기를 맞아 함안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고 어떻게 맞섰는지를 최대한 풍부하게 담은 것도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의 특징 가운데 한입니다. 남겨진 기록이 많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기록이 한 줄밖에 되지 않더라도 찾고 살려서 적었습니다. 덕분에 마흔이 넘는 분을 임진왜란 영웅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숨겨진 임진왜란 영웅들은 지금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일은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통쾌한 승리의 역사와 빛나는 영웅들만 나라를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꺼이 나섰던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영웅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영웅들의 낙동강 뱃놀이에 얽힌 얘기도 있습니다. 1607년 1월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한강 정구 함안군수 박충후 등 35명이 함안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함께 어울렸습니다. 전란 직후 전란을 몸소 겪은 이들이 벌인 위로 자축의 뱃놀이였습니다.
당대에 이미 이름이 높았던 이들이 참여하고 중심이 됐던 모임인지라 오랫동안 그 영향력이 이어졌습니다. 1600~1800년대는 물론이고 20세기 들어선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에도 그들을 기리는 뱃놀이가 계속되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당시 뱃놀이에 참여한 35명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칠원민란은 아마 함안·칠원에 관련된 역사 서술 가운데 최초이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기록을 나름대로 찾기는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학계의 연구도 전혀 없다시피 해서 참고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찾아진 만큼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1950년 6.25전쟁 초기 함안전투도 여태까지는 전투 그 자체의 치열함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에서는 당시 그렇게 치열하게 함안전투가 벌어진 배경과 함안전투 승전이 전체 국면에 끼친 영향을 알기 쉽게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밖에 말미에는 함안이 기록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도 한 꼭지 다루고 최소한 430년 전부터 선조들의 놀이 문화가 겹겹이 쌓여온 별천계곡에 대한 이야기도 따로 떼어 적었습니다. 다들 한 번은 눈길을 줄 만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주제어 : 지역, 함안, 칠원, 말이산고분군, 역사 인물, 문화, 임진왜란, 고려동, 생육신, 성산산성, 일제강점기, 함안전투, 갓뎀산
분류: 함안, 역사, 문화, 지역,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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