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 1
- <가야로 가야지> 쉽고 재밌는 가야역사 1 2023.12.15
가야로 가야지
제목 가야로 가야지
부제 쉽고 재밌는 가야역사
펴낸날 2023년 9월 25일
가격 18,000원
반양장본 | 248쪽 | 152*225mm
ISBN 979-11-86351-60-4(0391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지은이 김훤주
책 소개
대중적인 언어로 알기 쉽게 정리한
최초의 전체 가야 역사서
2023년 9월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되었습니다.
심사 과정에서 “주변국과 공존하면서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해 온 ‘가야’를 잘 보여주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증거”라는 좋은 평가를 받아 오랜 염원 끝에 기다리던 결실을 맺었습니다.
가야의 역사는 책을 통해 알아가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찾아 상상력을 펼치면 가야사는 훨씬 실감 나게 살아날 것입니다. 현장 탐방을 할 때 안내서로 활용해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아울러 가야를 알리고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박한 기원도 함께 담았습니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훤주
1963년 경남 창녕 출생
경남도민일보 출판국장
저서
<습지와 인간> <시내버스 타고 길과 사람 100배 즐기기>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경상권)>(비매품)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 <재미있는 우리 함주지>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 <재미있는 우리 칠원읍지> <함안에 담긴 역사와 인물> 등
목차
머리말
제1부 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
훑어보기
가야는 이름 부자
대표하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가야의 활동 무대는 어디까지?
가야의 시작은 언제부터?
가야의 역사(전기)
철의 왕국 가야의 탄생
가야의 화폐는 무엇이었을까?
가야 철소재의 인기 비결은
김수로와 석탈해 대결의 의미는?
언제까지나 걸을 순 없었던 꽃길
농수산물도 풍성했던 철의 나라
중국과 일본의 중계기지 가야
고구려의 낙랑·대방군 함락
위기는 기회로, 기회는 위기로
가락국이 지다
가야의 역사(후기)
새롭게 떠오르는 가야
대가야는 어떻게 가락국을 대신했을까?
미니어처 농기구는 어디에 쓰였을까?
대가야의 번성과 쇠락
가라왕 하지의 사신은 어떻게 중국에 갔을까 ?
언제나 넘버투였던 아라가야는 강했다
아라고당회의를 개최하다
가야의 종말
궁금한 이야기
가야 기록이 부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포상팔국은 어디에?
포상팔국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과거가 지금에게 건네는 이야기, 순장
순장에도 공식이 있었다
규모가 남다른 대가야의 순장
순장, 그 시작과 끝은
최강 군사력은 어느 가야였을까?
말의 일본 전래와 대가야
말은 화물차다? 장갑차다?
금공품도 전해주고
제2부 가야고분군을 찾아서
경상남도 김해시
구지봉만큼 신성했던 대성동고분군
무덤 위에 무덤을 만들다
봉분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도
전국 유일 가야 전문 국립김해박물관
쓰레기장을 품은 봉황동 유적
대성동고분군과 짝을 이루는 왕성 자리
대성동과 어깨를 겨룬 양동리
국제 교류의 중심 김해는 항구 부자
조선 도로보다 튼튼했던 가야 도로
가락국에서 가장 신성한 구지봉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의 원래 모습은?
부부인데도 무덤이 떨어져 있는 까닭은?
경상북도 고령군
산성과 왕궁, 그리고 고분군
높이는 그대로인데 지름은 작아지고
공유에서 전유로
신라에서 백제로 다시 신라로
처음엔 아래에 나중엔 위로
무덤에서 웬 음식물이
최초의 왕릉급 제73호분
최초의 석재 대형분 제75호분
가장 크고 도드라진 제5호분
특이한 순장으로 유명한 제30호분
부부 두 쌍이 나란히 제32~35호분
순장이 가장 많은 제44호분
빈 순장곽은 무슨 연유로?
제45호분은 제44호분의 왕비?
불교 수용의 증거 고아리 벽화고분
마지막 왕릉급 고아2리 고분
대가야 흙방울에 담긴 건국신화
새 위계에 걸맞게 건국신화를 새롭게
전라북도 남원시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전라권 최초의 가야계 국가 사적
중국산 청동거울과 백제산 금동신발
다른 가야의 여러 문물도
활발한 교류의 원인은 풍부한 철 생산
여러 우여곡절이 담긴 제36호분
전라권 가야가 처음 확인된 월산리고분군
온전하게 출토된 중국산 제품들
운봉고원 최초의 대가야계 고분은
바뀐 양식과 바뀌지 않은 양식
전라북도 장수군
백두대간 서쪽의 유일한 가야 세력
동촌리고분군의 말편자
장계분지 가야 고분의 집게·망치·모루
운봉고원보다 많은 제철유적
봉수의 종착지는 장계분지
전북 동부 가야의 자율성은 얼마나?
경상남도 합천군
이주민이 주인이 되다, 옥전고분군
신라계와 백제식은 무슨 이유로?
구슬이 지천으로 널린 구슬밭
작지만 다채로운 합천박물관
살기 좋았던 자리, 성산토성
해인사 국사단에 모셔진 정견모주
월광태자는 월광사지를 거닐었을까?
세 사람의 엇갈린 운명, 신라 충신 죽죽비
경상남도 함안군
탁월한 입지 선정, 말이산고분군
질서정연한 무덤은 다 계획된 것
거대한 봉분의 숨은 비결
말이산과 통합된 남문외고분군
딱 봐도 아라가야, 함안박물관
아라가야의 왕성, 가야리 유적
초대형 고대 건물터 당산유적
성산산성은 가야일까, 신라일까?
경상남도 창녕군
두세 집단이 공존한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특징이 많다는 특징
신라와 친하면서 독자성도 지켰다
또 하나의 비화가야 계성고분군
가야 최대 고분이 여기에
순장 소녀 송현이의 환생, 창녕박물관
가야의 여명을 여는 창녕지석묘
경상남도 고성군
이어붙이기로 초대형? 송학동고분군
일본의 오해가 밝혀지다
여러 계통의 유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다
내산리고분군, 해상교역의 주인공들
센 가야 사람들의 자취, 고성박물관
동외동패총과 솔섬 유적
송학동고분군을 지키는 만림산토성
기타 중요 유적
우리 옻칠이 확인된 창원 다호리 고분군
문자 생활의 증거도
2000년 세월에도 온전했던 통나무널
어떻게 살아남았지? 창원 성산패총
일제가 망가뜨린 진주 옥봉·수정봉고분군
백제가 왜 여기에, 의령 중동리고분군
겉은 가야 속은 신라, 양산 북정리고분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산청 전구형왕릉
남강 물길 따라 들어선 산청 생초고분군
임나일본부설을 깨뜨린 운평리고분군
섬진강 서쪽에도 가야가
낙동강 동쪽의 가야 복천동고분군
삼국유사의 그 가야 성산동고분군
신라 지배 아래서도 위세를 유지한 비결
가야 유물 박물관·전시관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경남 김해 가락국의 쇠락은 대성동고분군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가야의 고분이라 하면 우리는 높고 큰 봉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봉분은 5세기 초반에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5세기 중반 즈음부터는 밑지름이 40m가 넘는 초대형 고분까지 등장합니다.
그런데 가장 앞섰던 김해 가락국의 대성동고분군에는 이런 봉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6세기 전반까지 조성된 묘역이지만 그냥 나지막한 구릉만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고분이 어디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기도 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때의 가락국 최고위 지배계층에게는 그렇게 크고 높은 무덤을 만들 역량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선 시기 고구려군의 침공이 안겨준 상처가 그만큼 크고 깊었다는 얘기입니다. 대성동고분군의 무덤덤한 무덤들에서 지금 사람들은 한 시절 누렸을 영화의 무상함을 엿보게 됩니다. (본문 38쪽)
눈여겨볼 만한 것으로 순장이 있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산 사람을 함께 묻는 풍습을 말합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볼 수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가야와 신라에서 확인됩니다. 부여는 순장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실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신라는 임금이 죽으면 남자와 여자를 5명씩 순장했다는 기록과 함께 실제 순장 사례까지 확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가야는 순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발굴로 확인된 사례는 가장 많습니다. (본문 61쪽)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자체 생산한 물품뿐만 아니라 왜계, 북방계, 중국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이는 바다 물길을 통해 활발하게 이뤄진 국제 교류를 잘 보여줍니다. 이렇듯 무덤에서 나오는 다양한 유물은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3세기까지 농·어업 도구는 수입한 것이 대부분이고 분량도 많지 않았지만 4세기 후반에는 자체 제작한 것이 대부분이고 수량도 많아집니다. 낙랑·대방의 소멸과 국제 정세 불안 등으로 해양 교역이 어렵게 되자 농업과 어업으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지요.
무기와 갑옷·투구와 말갖춤 출토에서도 바뀌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중국·낙랑 계통의 수입품 위주였으나 김해 현지에서 제작한 무기·갑옷·투구·말갖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수량도 늘어나게 됩니다. 자체 역량으로 만들어낸 철제 전투 장비가 많이 출토된다는 것은 가락국이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음을 일러줍니다. (본문 88~89쪽)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제73호분은 5세기 들어 가장 이른 시점에 주산의 줄기능선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가지능선 끝자락에 자리 잡은 지름 22~23m 규모의 대형 무덤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대형 고분들은 무덤 속 주인공 공간을 모두 석재로 조성했지만, 제73호분은 유일하게 목재를 썼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목재로 만든 가야의 대형분은 김해 가락국의 대성동고분군에 많이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성동은 봉분이 나지막하고 지산동 제73호분은 높다랗다는 것입니다. 김해 가락국 전성기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대성동 제1호분의 뒤를 잇는 무덤인 것입니다. 이는 대성동고분군의 전통을 대가야에서 계승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동시에 대가야의 번성과 지산동고분군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고분이라는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114쪽)
전라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가야 유적은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입니다. 동네 명칭은 2개지만 서로 딱 붙어 있습니다. 동쪽 인월면 유곡리와 서쪽 아영면 두락리에 걸쳐서 두 봉우리를 끼고 능선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40기 남짓이 확인됐지만 발굴을 기다리며 풀숲에 뒤덮여 있는 것은 훨씬 더 많습니다.
중심 연대는 5세기 중엽~6세기 초엽으로 대가야권역에서 보자면 합천 다라국의 옥전고분군과 충분히 견줄 만한 상위고분군입니다. 지름 20m 이상인 대형분은 14기인데 30m 이하가 열셋이고 30m 이상도 높은 자리 능선에 하나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20m 이하이며 지름 8m 안팎의 소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적이 1973년 전라북도기념물로 지정될 때는 백제계나 마한계일 것이라고 대부분 사람들이 짐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1989년 발굴에서 대가야계로 밝혀졌고 이후 가야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2018년입니다. 전라권 가야 유적에서 최초로 국가 사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본문 136~138쪽)
대가야계 고분군은 전북 남원의 운봉고원 말고 장수군의 진안고원에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동촌리고분군 등에서 확인된 가야계 중대형 고분은 240기를 웃돕니다. 남원에서 확인된 180기보다 많습니다. 시기적으로는 4세기 말엽~6세기 중엽에 해당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진안고원이 백두대간의 서쪽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원의 운봉고원은 같은 전북이라도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보면 그 동쪽에 있습니다. 대가야를 비롯한 여러 가야가 있었던 경상도에서 보자면 가야 세력이 백두대간을 넘어 이주·진출한 유일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 가야 고분들은 남원의 운봉고원과도 구분되는 점이 있습니다. 출토되는 유물이 대가야 색채를 뚜렷하게 띠거나 자체 제작된 것도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백제 토기가 함께하는 것이 독특합니다. 반면 다른 가야 집단의 유물은 많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들과의 교류·교섭이 적거나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본문 152쪽)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은 다라국을 다스리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조성된 묘역인데 왕릉급 고분은 5세기 초반~6세기 초반에 들어선 것입니다. 처음 무덤은 그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1세기 즈음이었습니다. 규모나 유물이 보잘것없었습니다. 권력의 형성과 계층의 분화를 보여주는 최초의 무덤은 4세기 후반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도 확실하게 구별될 정도는 아니었고 같은 집단 내에서 조금 우월한 정도의 무덤이었습니다.
5세기 초반이 되면 앞 시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고분이 등장하게 됩니다. 무덤의 내부 구조와 규모, 그리고 유물의 내용이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것입니다. 실생활용 말갖춤과 장식용 말갖춤, 금동 고깔모자와 금귀걸이 같은 금동제 공예품 등 기마용 문물과 화려한 장신구가 출토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유물들은 앞선 시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4세기까지 그 일대에서 살았던 이들의 문물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5세기 초반이면 고구려 광개토왕이 가락국을 공략한 직후입니다. 그때 한반도 남부는 극심한 정세 변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른 지역에 살다가 이곳으로 들어온 이주민들이 다라국을 성립시켰습니다. (본문 163쪽)
경남 함안 가야리 유적은 아라가야의 왕성이 발견된 자리입니다. 그동안 글이나 말로만 전해오던 아라가야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유적이 나지막한 야산 꼭대기에서 토성에 둘러싸인 채 나타났습니다. 함안 가야리 유적의 토성은 김해의 봉황동 유적 토성이나 합천 옥전고분군의 성산토성과 달리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높이는 최고 8.5m이고 너비는 20~40m인데 같은 시기의 다른 가야 권역에는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밑바닥은 암반으로 덮여 있는데 나무기둥을 박았던 구멍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습니다. 통나무 울타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던 자리이거나 멀리 망을 보았던 망루, 또는 마루를 높게 설치한 고상 건물의 흔적들입니다. (본문 188~189쪽)
경남 창녕의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비화가야가 전성기를 맞기 직전인 5세기 중반부터 멸망 이후인 7세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됐습니다. 200년 동안 초대형에서부터 중소형에 이르기까지 1000기 남짓 되는 고분이 들어섰습니다. 200년 동안 1000기라면 해마다 5기씩 봉분을 쌓아올린 셈이니 당시 기술력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닌가요.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교동1·2군과 송현동 3·4군 등 넷으로 구분이 됩니다. 교동은 1군과 2군이 붙어 있지만 송현동은 3군과 4군이 떨어져 있습니다.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은 5세기 중·후반의 교동2군이고, 교동1군과 송현동3·4군은 6세기 초반부터 동시에 만들어졌습니다.
세력이 비슷한 두세 집단이 공존하면서 교동과 송현동으로 양립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다른 가야고분군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대형 왕릉급 고분이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어서 대형·중대형 고분이 왕릉급을 위성처럼 감싸고 그 주변에 다시 중소형 고분이 여럿 들어서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본문 196~198쪽)
경남 고성의 가야 세력을 소가야라고도 했다는 사실을 두고 대가야(큰 가야)와 반대되는 소가야(작은 가야)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가야라는 이름은 땅이 좁다거나 힘이 약하다거나 막연하게 그런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고성은 해양 교역을 발판으로 성장한 센 나라였습니다. 교역의 주력 물품은 바로 ‘쇠’였지요.
옛날 사람들은 지명을 한자로 적으면서 뜻을 가져오기도 하고 소리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소(小)가야에서 ‘작다’는 뜻을 가져왔으면 스스로 작은 가야라고 낮추는 형상이 되고 소=쇠라는 소리를 가져왔으면 쇠의 가야가 돼서 나라의 근본 속성을 밝히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사실과 가까울까요? (본문 215쪽)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념
가야고분군은 가야 연맹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주변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와 함께한 가야 문명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가야 문명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여러 국가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유산입니다.
최근 활발한 발굴을 통해 실체가 드러나면서 가야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편적인 수준에 머무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야의 600년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조망할 수 있는 종합 개설서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풀어놓는 것까지 더할 수 있다면 좀더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개별 지역마다 크고 높은 봉분을 쌓을 수 있었던 배경, 공동체를 지배하고 호령했던 주인공들의 모습, 여러 나라들과 맺었던 관계와 교류가 어떠했는지 등 궁금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습니다.
무엇보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문가나 학자가 아니면 읽어내기 어려운 그동안의 가야사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물론 부족한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역사애호가로서 의무감 6 궁금증 4로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많은 이들이 가야에 좀더 편하게 다가설 수 있는 장점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제어: 가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야고분군
분류: 발굴, 고고학, 생태, 환경, 역사,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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