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 1
- <80년대 경남 독재와 맞선 사람들> 80년 민주화의 봄부터 87년 유월항쟁까지 2020.11.23
제목 80년대 경남 독재와 맞선 사람들
펴낸날 2020년 11월 20일
가격 15,000원
반양장본 | 280쪽 | 145*210mm
ISBN 979-11-86351-31-4 (0391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지은이 김주완
책 소개
87년 경남에서 벌어진 항쟁은 전국적으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국제축구경기가 중단되는 과정이 생중계로 통해 전국에 방송된 마산의 6·10시위와 남해고속도로 점거 및 LPG차량 탈취 시위로 전국에 혁명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진주 6·17시위는 6월항쟁의 열기를 가열·확산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후 서울의 시각에서 씌어진 6월항쟁 기록물들은 이 두 가지 시위에 대해 하나의 ‘에피소드’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지역의 관점에서 지역사람들이 6월항쟁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은 80년대 경남의 각 부문별 민주화운동과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단체의 억압과 저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경남의 기록이긴 하지만, 서울 이외에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 될 것이다.
저자 소개
*지은이: 김주완
1990년 기자 노릇을 시작해 31년째 이러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출판미디어국장, 전무이사를 했고 블로그와 유튜브도 운영 중이다.
<토호세력의 뿌리>,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 인생>, <풍운아 채현국>, <별난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 등 책을 썼다.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 80년 짧았던 민주화의 봄
짧았던 민주화의 봄
마산 이어 진주의 ‘남강도하작전’
5·17과 5·18로 짓밟힌 꿈
노동자들도 나섰지만
2장 | 80~83년 대학가의 ‘암중모색’
70년대와 80년대의 만남
대학가 ‘학습’ 소모임들의 물밑 모색
지도휴학·강제징집·제적
반정부 유인물 살포사건
3장 | 80년대 중반 농민·문화운동 결합
농민운동의 태동
가톨릭농민회의 투쟁
농민운동과 문화운동의 결합
한국 농민운동의 산 증인 정현찬 씨
4장 | 84년 학원자율화 투쟁
대학에 상주하던 사복경찰들
제적생 복교와 학원자율화 투쟁
총학생회 부활, 결국 85년으로
5장 | 85년 총학생회 부활과 학생운동
6장 | 87년 이전의 노동운동
일본인들에게 점령된 마산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만남
현장에서 단련된 ‘학출’과 ‘노출’
문성현과 이석행 운명의 만남
7장 | 87년 이전의 지역 재야운동
허진수 씨, 부마항쟁 세대로 6월항쟁에도 참여
8장 | 87년 이전의 교육·여성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대학교수의 시국선언
여성운동
학생운동권 출신 조창래 교사
82년 Y중등교육자협 김용택 교사
9장 | ‘아부’와 ‘저항’으로 갈라진 문인들
문학운동
마당극 운동
대안언론 운동
10장 | 항쟁의 시작, 86년 투쟁
막 올린 민주헌법 쟁취투쟁
경남 4개 대학 연합 시위
공개 투쟁조직의 출범
겨울방학에도 계속된 투쟁
창원대 ‘지하 운동권’ 조재석씨
11장 | 박종철의 죽음과 2·7국민추모회
2·7 국민추도회로 항쟁 점화
지역언론의 눈물겨운 정권 옹호
12장 | 87년 3월에서 4·13까지
87년 3·4월의 언론보도
마산·창원·진주, 그리고 거창에서
진주 대아고 학생들의 고교민주화 투쟁
13장 | ‘4·13호헌’ 후 지역유지들은 뭘 했을까
항쟁 불타오르는데 꽃씨 뿌리기 행사?
반상회 열어 호헌조치 정당화 안간힘
총장들, 교수 시국선언 탄압 혈안
문인들 권력 아부성 결의문 채택
가든파티에다 룸살롱 폭탄주 파티까지
14장 | 6월 항쟁의 전운
줄 잇는 4·13호헌 규탄 집회
정권과 학교당국의 결탁
천주교 신부와 수녀들의 투쟁
학교당국의 또 다른 ‘꼼수’
15장 | 신부 목사 약사 교수 교사 문화인들의 참여
기독교 목사들 삭발·단식
약사와 대학교수·교사·문화인도 동참
16장 | “6·10 대회를 막아라”
6월초 ‘경남국본’ 결성
문교부의 치졸한 시위 저지 전략
내무·법무장관의 대국민 협박
대회 저지에 민간인까지 동원
17장 | 6·10 대회 막이 오르다
도내 각 대학 사전집회
진주·진해·거창에서도 독자 집회
아침부터 진해 6·10 시가행진이 벌어진 까닭
18장 | 6·10 대회의 주요 타격대상은?
국제축구경기 중단, 국내외 관심
알아서 기는 지역신문 보도
독재에 빌붙은 기관 집중 타격
19장 | 4·19 이후 진주 최대 시위…항쟁 재점화
공무원 6명이 농민 1명 감시
항쟁의 거점, 마산에서 진주로
4·19 이후 최대의 시위
진주시내는 ‘해방구’
20장 | 경찰 과잉진압이 부른 고속도로 점거
경남대 유장근 교수도 경찰에 연행
창원전문대생도 학내문제로 농성
15일 진주 시위에 놀란 경찰
사상 초유 고속도로 점거 시위
21장 | 세계를 놀라게 한 고속도로 가스차 탈취 시위
태도 달라지기 시작한 경남신문
경상대생의 가스차 탈취
마산·창원도 산발 시위 계속
전국 놀라게 한 가스차 탈취 충격
22장 | LPG가스차 위에서 횃불 들고 "죽자! 죽자!"
러닝셔츠로 횃불 만들어
경찰의 기습작전 배경은
전국 시위 격화 계기 제공
진주교대에서도 시위
23장 | ‘군부 개입설’… 긴장 속 6·26 총궐기 임박
진주교대·인제대·마산간전도 시위 동참
6·26 총궐기를 준비하다 전국 시위 격화 계기 제공
군부 개입 가능성 보도 눈길
24장 | 경남의 6·26 대행진
마산 2만, 진주 2만 거리 장악
진해·김해·거창에서도
경찰이 깡패들에게 얻어맞은 사연
25장 | 6·29선언 그 후
6·29 항복선언 직전 경찰의 폭력
이후에도 계속된 경찰의 폭력 진압
지역언론 민주화에 대한 열망
등장인물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한창이던 1982년, 매서운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겨울 언덕에 서서’ 민주화의 싹을 틔우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부마항쟁 세대였던 주대환, 박진해, 서익진, 박영주, 이태수 등이 만든 <마산문화>가 그것이다. 1980년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이어진 광주학살, 81년 6만 명 이상을 체포, 감금했던 삼청교육대 지옥훈련 등으로 온 사회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이었다.
82년 말 발간된 부정기간행물 <마산문화> 1호 ‘겨울 언덕에 서서’는 80년대 최초의 노동소설 ‘수출자유지역의 하루’최순임, 본명은 주식회사 삼미의 고경엽, 비판적 시인 이선관의 시세계를 소개한 ‘이선관 시론’박진해, 문화운동의 현황을 짚은 ‘마산 동신제와 지신밟기’박진해, ‘마산연극의 흐름’박영주, ‘마산의 청년문학 동인활동’이재업, 그리고 ‘민족·민주주의·민족해방운동’서익진, ‘알제리 민족해방전쟁’김종철, ‘니카라구아에서의 해방전쟁’번역물 등 당시로선 불온하고도 위험한 글들이 실려 있다.
(2장 | 80~83년 대학가의 ‘암중모색’ 中 34쪽)
“송기원이라는 소설가 선배를 잘못 만난 탓이지요. 75년 중앙대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그 선배가 시키는 대로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집회현장에서 읽었다가 경찰에 잡혀갔지요.”
거창 갈릴리교회 유성일 목사는 거창YMCA 출신인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과 함께 70·80년대 거창지역 농민운동과 각종 사회운동의 산파이자 핵심이었고, 또한 거점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와 관련,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고 한신대로 진로를 바꿔 신학을 공부한 후 80년 정찬용 씨와 인연으로 거창에 정착하게 됐다.
그는 표만수·정쌍은 등 농민운동 핵심인물들과 함께 농민회를 만들고 지역운동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농촌지역으로는 드물게 87년 6월항쟁 시위를 주도했다.
86년 갈릴리교회를 설립한 후 ‘어린이집’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지역최초로 탁아운동을 시작했으며, 2019년 7월 작고했다.
(3장 | 80년대 중반 농민·문화운동 결합 中 48쪽)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3·15마산의거 직후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추모시 <베고니아 꽃잎처럼이나>를 발표하기도 했던 김춘수였지만, 전두환 독재의 총칼 앞에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통영 출신으로 통영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마산의 민족자산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일당과 함께 민정당 창당발기인 15명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그 덕에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9장 | ‘아부’와 ‘저항’으로 갈라진 문인들 中 103쪽)
15일 자 사회면은 ‘개헌논의 빙자 불법행동 엄단, 김 법무 지시 전국 공안검사 비상근무체제 돌입, 중범자엔 법정최고형 구형’이란 기사가 나왔는데, 그 옆에는 ‘봄맞이 대청소’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실려 있다. 비상한 시국에 비해 참으로 한가롭게 여겨지는 풍경이었다.
17일 사회면에 보도된 ‘꽃씨 뿌리기 시범행사’도 그랬다.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조익래를 비롯한 도단위 기관장과 도청·창원시청 직원 550여 명이 창원시청과 중앙로터리변에서 백일홍과 맨드라미·봉선화 등 꽃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았다는 기사였다.
22일에는 ‘급진좌경 의식화 오염방지 주력’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사 옆에 <경남신문> 박정명 사장이 진해 이충무공호국정신선양회회장 이상인로부터 진해군항제 행사에 대한 협조와 성원에 감사하는 표시로 감사패를 받았다는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다.
(13장 | ‘4·13호헌’ 후 지역유지들은 뭘 했을까 中 151~152쪽)
하지만 진주와 진해, 그리고 거창에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소규모 집회가 열렸다. 진주의 경우 경상대 학생들과 별도로 통일민주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농성과 집회를 열었던 것이다.
다음은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경남신문 기자의 메모이다.
“진주시 통일민주당 경남 제3지구당 당사에서 ‘국민 합의 반대하는 호헌 철폐, 행동하는 국민 앞에 박종철은 부활한다’는 유인물 살포와 함께 상오 10시 40분께 옥외방송이 시작됐고, 하오 2시 40분께 경찰 병력이 투입돼 일부 당원이 연행됐으며, 그 주변은 삼엄한 경찰의 경비가 펼쳐졌다. 하오 3시 30분께 경찰은 당사 옥외스피커를 철거하고 연행당원을 훈방시켰다.”
이 메모는 진해 상황에 대해서도 “오전 11시 여좌동 여좌성당 허성학 신부와 신도 50여 명이 ‘4·13조치 철회하라’는 내용의 피킷을 들고 시내를 거쳐 성당에 입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17장 | 6·10 대회 막이 오르다 中 187~188쪽)
마침내 15일이 밝았다. 이날은 4·19혁명 이후 진주에서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날이었다. 80년 봄 ‘남강 도하 작전’ 때도 대규모 거리시위가 있었지만, 그땐 시민들과 결합하지 못한 학생들만의 저항으로 끝났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미리 계획된 대로 아침 9시부터 각 단과대별로 집결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3000~5000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수업과 기말고사를 전면거부하고 시내 진출을 시작했다. 대형 태극기를 든 공대생을 선두로 정문과 후문을 돌파한 학생들은 오전 11시 30분쯤 새벼리와 대동중공업을 지나 구호를 외치며 진주역 사거리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1000여 명이 약식집회를 마치고 시내로 진입할 무렵에는 이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군중이 불어나 있었다.
(19장 | 4·19 이후 진주 최대 시위…항쟁 재점화 中 213쪽)
17일 경상대생들의 두 번째 고속도로 점거와 LPG 운반트럭 탈취사건은 다음날 대부분의 전국언론에 머리기사로 보도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상황 판단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경찰 간부 장충남 씨(현 남해군수)는 “15일 진주시위 이후 16·17일에는 진주에 가장 많은 경찰이 배치됐다. 울산에 있던 경찰력도 왔는데, 모두 8개 중대쯤 되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 경찰관은 “그런 상황에서 17일 LPG 차량 탈취사건이 일어났으니 난리가 났다.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걸려와 상황을 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석간인 <경남신문>에 앞서 서울지역 신문들은 조간에서부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1면 톱으로 ‘남해고속도 3시간 장악 - 경상대생들 마~진 열차도 한때 막아’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사회면에도 ‘지방시위 갈수록 격렬-진주 LP 가스차 2대 폭파 위협’ 기사와 사진을 톱으로 올렸다.
(21장 | 세계를 놀라게 한 고속도로 가스차 탈취 시위 中 236쪽)
“오후 7시 25분 구경꾼들 용마공원(200), 제비산(150), 로얄호텔(50), 인근 빌딩 옥상 등에 분산 관망 중. ‘와’ ‘민심은 떠났다’ ‘최루탄 쏘지마라’.”
“오후 9시 35분, 월남다리 옆 명성예식장 부근서 사복경찰에 연행 중이던 학생 2명 시민들이 탈취, 전경과 시민 시비 소란.”
“오후 10시, 코아 앞 시위대 경찰 최루탄 발사로 해산. 창동 일대 시위대가 거의 점거. 규모 1만 5천. 학생보다 시민 수 많다.”
“오후 11시 10분, 양덕, 산호1, 회원 등 파출소 노인 동원 음주 파티 벌여 투석 막고 있다.”
위의 인용문들은 87년 6월 26일 경남신문 취재기자들의 전화 보고를 시간대별로 메모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렇듯 이미 민심은 독재정권을 떠난 듯 했다. 학생이 연행되면 시민이 달려들어 구출했고, 시위대 중 학생보다 시민의 수가 많았다. 경찰도 시위대를 진압할 힘을 잃었다. 시위대의 투석을 막기 위해 노인들을 파출소에 불러 음주파티를 열어주는 웃지 못할 상황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소극적인 보도태도를 보여온 <경남신문>도 이날 시위에 대해서는 다음날 1면과 사회면 머리기사로 비교적 상세히 시위 소식을 전했다.
(24장 | 경남의 6·26 대행진 中 257쪽)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김태리 하정우 강동원 등이 출연한 영화 <1987>이 개봉되면서 많은 사람, 특히 1987년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2016~2017 촛불혁명이 80년대의 폭압적인 대국민 감시체제 하에서도 독재권력에 저항해온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대의 한 부분적 단면을 보여줄 뿐 전체를 담지 못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전국 몇몇 대도시에서도 항쟁이 있었다는 것을 몇 개의 사진으로 보여주지만,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상황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6월항쟁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맞지만, 자칫 영화만 보면 그것만이 항쟁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착각할 우려도 있다.
이 책은 서울이 아닌 경남지역에서 1980년대 독재에 저항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책은 또한 1987년 유월항쟁 뿐 아니라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박정희의 사망, 전두환의 등장과 권력 찬탈,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학생과 시민 등 각 부문별 저항이 어떻게 조직되고 발전해왔는지를 살피고 있다.
특히 경남은 당시 부산과 더불어 1987년 6월 14일 서울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되면서 소강상태였던 시위에 기름을 붓는 15~18일 시위로 전국에 충격을 줬다. 이는 전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워싱턴포스트> 등 외신에도 크게 보되었다. 이후 전국의 시위가 더 확산되었음은 물론이다.
주제어: 민주화운동, 6월항쟁, 경남6월항쟁, 부마민주항쟁, 군사독재
분류: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역사 > 테마로 보는 역사 > 혁명사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전두환정부/노태우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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