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산' + 1
- 건달할배 채현국과 친구들 1 2023.05.15
펴낸 날 : 2022년 9월 1일
가격 : 16,000원
반양장본 | 288쪽 | 152*225mm
ISBN 979-11-86351-38-3(03800)
펴낸 곳 : 도서출판 피플파워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90, 0194
www.idomin.com
저자 : 황명걸 신경림 백낙청 염무웅 등 37명
책 소개
꼰대가 되기 싫은 젊은이를 위한 책
“노인들을 이해하지 마라.
대신 똑똑히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세상 흐름을 거스르는 철부지 노인들을 향한 느닷없는 일성으로 단박에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한 몸에 받았던 채현국 선생. 본인이 80 노인이면서도 덜떨어진 ‘꼰대’ 노인들의 시대착오를 거침없이 비판했던 늙은 청년 채현국 선생.
이제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1년 하고도 5개월이 지났다. 2021년 4월 2일 영원한 소풍을 떠나기 전날 선생은 본인의 뜻대로 입원 병동에서 자택으로 자신을 옮겨갔다. 목숨을 늘리는 연명 치료를 뒤로 하고 어떤 비감도 없이 삶과 죽음을 담담히 맞아들였다.
돌이켜보면 채현국 선생의 어떤 일갈이나 한 마디 명언 때문에 젊은이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선생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꿰며 일치시켜온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많은 젊은이들이 아무 망설임 없이 ‘시대의 어른’이라는 헌사를 선생께 올렸던 까닭이다.
선생은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미련 없이 버렸다. 자신을 위해서는 손톱만큼도 쓰지 않고 사회를 위해 일하다가 핍박받는 당대 젊은이들을 위해 물 쓰듯 자기 재산을 썼다. 그것도 남몰래.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일반 분야에서 민주화 등 공익을 위해 활동한 이들 가운데 적어도 1,000명 이상은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스스로 무소유의 화신이 되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지에 매이지 않은 구름처럼 살았다. 장삼이사들 틈에 끼여 표나지 않게 살면서 그 장삼이사들의 삶과 정과 놀이에서 달콤한 행복을 느꼈다. 효암학원 이사장으로 있을 적에는 작업복 차림에 화단에 김매기를 일삼아 학생들조차 한낱 인부로 여겼을 정도로 나 이런 사람이요 뻐기지 않았다.
선생은 오히려 세상이 알아볼까 봐 낮추고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향기가 천 리에 퍼지듯 세상이 선생을 알아보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상황이 달라지자 선생은 자신의 몸조차 아끼지 않았다. 갖은 질환이 있는데도 요청과 필요가 있는 자리라면 빠지지 않고 가서 거침없는 사자후로 촌철살인을 했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고 죽음은 삶의 연장임을 온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였다.
선생이 떠난 자리에는 허전함과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을 털어내고 허전함을 떨치기 위해 길게는 70년 이상을 함께했던 서른일곱 분의 추억을 모았다. 여기에 이 시대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던 채현국과 그 친구들의 빛바랜 청춘들이 반짝이고 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장면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청춘이라서 익숙하고 그때와 지금은 배경이 달라서 낯설기도 하다.
제1부는 채현국 선생이 주인공이다. 제2·3·4부는 선생보다 먼저 하늘나라 소풍에 들어간 선생의 친구들, 민병산·박이엽·이계익·이구영·조관준·천상병 선생들이 주인공이다. 부록에 담긴 대담과 강좌 두 꼭지는 선생의 살아생전 생각과 말과 행동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나는 늙어도 저따위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청춘이라면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채현국(1935~2021년)
1. 일생
일제강점기인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난 채현국 선생은 1960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중앙방송>(현 한국방송) 연출로 입사했다. 하지만 5.16군사쿠데타 세력이 방송을 군사정권의 선전도구로 써먹으려고 하자 석 달 만에 그만뒀다.
이후 아버지가 운영하던 부도 직전의 탄광으로 내려갔다. 강원도 삼척군 도계의 흥국탄광을 일으켜 손꼽히는 광산업체로 키웠다. 한때 조선·화학·해운 등 24개 기업을 운영하며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2위에 오를 정도로 거부가 됐다.
그러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으로 장기독재를 시작하자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유착하지 않으려면 사업을 접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이듬해 미련없이 모든 재산을 처분해 동업하던 친구들과 광부들에게 나눠 줬다.
동시에 이전부터 해오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을 이어나갔다. 정권에 쫓기는 이들을 숨겨주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과 본격적으로 함께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창작과 비평>의 뒤를 봐주고 가난한 문인과 예술가들을 조건 없이 지원했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에게는 집도 사주었다.
1988년 효암고교와 개운중학교를 둔 효암학원의 이사장에 취임한 뒤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무급으로 일했다. 학교 운영에서는 재단이나 이사장이 아닌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삼았고 자율과 자발성을 앞세웠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가 결성되면서 문교부는 가입 교사를 해직하라고 지시했지만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선생은 이렇듯 엄청난 거부였으나 모두 내려놓았다.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는 대신 평생 아래에 머물렀다. 험악한 시대를 살면서 격랑에 휘둘리지도 않았고 속된 욕망에 영혼을 맡기지도 않았다. 성장을 멈추면 ‘꼰대’가 되고 계속 성장하면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선생은 진정한 어른이었다.
2. 남긴 말씀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학교는 좋은 학생만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교사도 길러낼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교사들이 학생을 가르치려고 들면 안 된다. 교사가 제대로 성장하면 그게 학생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 천 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을 벌다 보면 어떻게 하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없다. 한 문제에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쓴맛이 사는 맛’을 묘비명으로 삼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만 새겨두면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자라 할 것 같으니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 덧붙여야지. 어떨 때 단맛이냐고?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
“서른다섯에 당뇨가 나오면서 이가 다 빠졌어요. 그만 처먹으라고 빠진 건데 또 해 넣을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당뇨는 많이 먹어서 나는 병인데…. 이를 안 해 넣었기 때문에 적게 먹어서 이렇게까지 살아있는 겁니다. 해 넣었으면 훨씬 빨리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잇몸으로 먹으니까 불편할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이렇게 배 나오고 했는데.”
저자 소개
고은광순(평화어머니회 상임대표), 구중관(소설가), 김낙영(시인), 김보경(『낭독은 입문학이다』 저자), 김운성(소녀상 조각가), 김승환(출판편집인), 김주완(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김철환(대덕잡구 대표), 김태동(전 청와대 경제수석), 남난희(산악인), 노광래(갤러리 씨네 부장), 박구경(시인), 박상희(조각가), 박영현(도예가), 방영웅(소설가), 배평모(소설가), 백낙청(<창작과 비평> 명예편집인), 복기대(인하대 교수), 서승(우석대 동아시아연구소장), 신경림(시인), 염무웅(국립한국문학관 관장), 이기흥(전 서울예술대학 재단 이사장), 이만주(춤비평가), 이상만(소리글쟁이), 이용학(전 효암고 교장), 이종찬(전 국가정보원장), 이진영(이문학회 회우), 임계재(중문학자), 임락경(목사), 전종덕(저술가), 정명숙(산악인), 정상학(전 대구고등법원장), 최규일(전각가), 최정인(섬유공예작가), 최혁배(미국 변호사), 허태수(목사),황명걸(시인) 등 37명
목차
제1부
명동, 관철동, 인사동 세 시절_황명걸 9
채현국 선생님을 기리며 할머니 꼰대가 되지 않기를_고은광순 19
‘라 마르세예즈’의 밤_김보경 26
채현국 선생의 존댓말_김운성 31
풍운아 채현국_김주완 33
채현국 선생님께_김철환 38
43년 늦었던 만남, 너무 빨리 끝나다_하제 김태동 41
그때 지리산 종주 이야기_남난희 45
산타와 늙은 청년 채현국_박상희 50
건달 할배와 호빵_달묵 박영현 53
현국이 생각_백낙청 59
마달거사 채현국_복기대 63
‘한국의 큰 건달’ 채현국 선생_서승 74
채현국 선생 추억_신경림 80
자유인 채현국 선생을 기억하며_염무웅 82
6.25동란이 맺어준 나의 영원한 벗 채현국_이기흥 92
채현국 선생의 파리 시절과 헌시 두 편_이만주 96
못 생겨서 다행이었다_이용학 110
채현국을 생각한다_이종찬 113
스승의 은혜_임락경 116
채 선생님_전종덕 126
징검다리_정명숙 131
영원한 천재 맨발의 마달이_정상학 137
선생님이 떠난 지 1년_최규일 139
인사동과 나의 추억_최정인 141
허군, 내 집으로 가세_허태수 144
제2부
거리의 철인_김낙영 149
인사동 그때 그 얼굴 평론가 민병산_김승환 154
기러기 훨훨_방영웅 164
민 선생님 追想 _최혁배 166
제3부
박이엽 선생 생각-인사동에서_박구경 179
박이엽 선생님과 「씨칠리아 마부의 노래」_임계재 181
늘 앞서가던 멋쟁이 박이엽_황명걸 188
제4부
소년 뱃사공 이계익_구중관 197
노촌 이구영 선생님과 이문학회_이진영 207
알타이하우스와 조관준_이상만 221
평화를 쪼다 날아간 파랑새_배평모 224
부록
채현국·채희완 대담 241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268
에필로그 288
책 속으로(본문 중에서)
채현국은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출신으로, 백낙청 명예교수와 함께 <창작과 비평>을 창간한 막후의 산파역이다. 부친의 광산개발로 뒤늦게 부자가 된 그는 혼자만의 부는 값어치가 없다고 여겨 어려운 친구들을 도우니,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친구가 없을 정도였다.
(11쪽. 명동, 관철동, 인사동 세 시절-황명걸)
여성동학다큐소설 출판기념회에서 채현국 선생님은 축사를 하시기에 앞서 갑자기 무대 위에 앉은 우리 작가들에게 큰절을 하셨다. 우리도 황망히 일어나 맞절을 드렸다. 상명하복, 위계질서 깨기, 권위주의의 파괴는 나도 주장해온 바이지만 채현국 선생님의 급습(^^)은 과연 선생님다운 것이었다. 백 마디의 축사와 격려사가 이 보다 더 가슴을 파고들 수 있으랴.
(21쪽. 채현국 선생님을 기리며 할머니 꼰대가 되지 않기를-고은광순)
“주완이 혀~엥!” 가끔 채현국 선생은 이렇게 나를 불렀다. 무려 28년이나 어린 나에게 ‘형’이라니…. 선생은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하대하지 않았다. 그건 일본 사람들 습관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또한 “인류 나이로 치면 젊은이 나이가 노인보다 많다”고도 했다. 처음 만나 인터뷰할 땐 나를 ‘선생님’이라 칭했다. 그러다 친해지니 ‘형’이라고까지 불렀던 것이다. 인류 나이로는 내가 선생보다 형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선생은 늘 기존관념과 상식을 뛰어넘었다.
(33쪽. 풍운아 채현국-김주완)
문득 43년 지난 1971년 봄이 떠올랐다. 어느 벗을 통해 소개받아 흥국탄광에 가서 일한 3주간이다. 완행열차를 타고 강원도 도계역에 도착하여, 물어물어 찾아가, 노무과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다음날부터 일하였다. 갱에는 못 들어가고, 석탄을 화물차에 싣는 일, 잡석을 인공 비탈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 등을 하였다. 월급날도 되지 않았는데, 사무실로 누군가 불러 월급을 주면서,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 탄가루투성이인 작업복 한 벌을 보따리에 넣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아, 그때 탄광의 경영자가 ‘채현국’ 선생님이셨구나!”
(41쪽. 43년 늦었던 만남, 너무 빨리 끝나다-김태동)
선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언제나 또랑또랑한 음성과 유쾌하고 유머 있는 말솜씨에 꼰대스러움이 전혀 없이 좌중을 집중시키는 능력이었다. 더구나 그의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을 보는 시선은 어떤 젊은이보다도 젊었다.
우리의 익숙했던 생각을 역설적으로 바꿔 다른 가치로 세상을 보게 한다. 부드러움 속에 날카로운 지성으로 정의에 반하는 것을 질타하기도 한다. 자신이 노인이면서도 오히려 “노인을 믿지 말라”라고까지 한다.
(51쪽. 산타와 늙은 청년 채현국-박상희)
채 선생님이 평생 기억하는 친구가 몇 분 있다. 박윤배, 천상병, 이선휘, 박이엽, 김재익, 이종찬, 김우중, 서입규 등등이다. 이 중에 가장 아파하는 친구가 김재익과 박윤배였다. 기분이 울적한 날에 김재익과 박윤배 얘기를 종종 하셨는데, 가끔 콧등이 붉어지면서 말씀을 하시곤 했다.
(65쪽. 마달거사 채현국-복기대)
그때 채 선생한테 받은 후원금과 필자들에게 지급한 원고료 액수를 또박또박 적어놓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몇천만 원이 될지 모르는데, 돈의 액수도 액수지만 그보다 나름의 역사적 기록이 될 터였다.(하지만 때로는 그런 기록이 유죄의 증거로 악용되던 시대도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87쪽. 자유인 채현국 선생을 기억하며-염무웅)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하루 24시간이라는 귀한 선물을 매일매일 차별 없이 받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그중 많은 시간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데 써야만 한다. 하지만 채현국은 한동안 흥국탄광 경영자로서 일했을 때를 빼고는 시간에 쪼들림이 없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해가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생계를 위해 시간 가난에 쪼들리고 있을 때 그는 흥국탄광 경영을 친구 박윤배(경기중학교생, 대구 피란중학에서 만난 절친) 에게 맡겨 놓고 이 친구, 저 친구 찾아다니며 정신적 멘토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던 진정한 ‘벗’이었고, 부자였고 자유인이었다.
(93쪽. 6.25동란이 맺어준 나의 영원한 벗 채현국)
“쓴맛이 사는 맛”/ “모든 예술은 남들이 봐 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명석한 그는 쏟아놓느니 경구였고/ 우리말 근원과 생성 분석에 특출났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즐거웠다/ 그는 기록적으로 작은 키였음에도/ 작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거인처럼 보였다.
(108~109쪽. 채현국 선생의 파리 시절과 헌시(獻詩) 두 편-이만주)
이렇게 우리의 우정은 시작되어 평생을 이어졌다. 내가 군에 있을 때나, 기피의 대상인 남산정보기관에 있을 때나 그는 한결같은 독설가로 나를 책망하고 격려하였고, 내가 정계에 입문하여 여의도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는 골목 정치, 대로 (大路) 정치를 마음대로 구사하면서 나의 책사역 또는 고문역을 담당하였다. 그가 해설하는 정치구도는 특이했고,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었다. 엉뚱한 이야기로 장내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파장(罷場)이 되면 그의 말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다.
(114쪽. 채현국을 생각한다-이종찬)
“그 당시 광업소에 있었던 사람들 똑같이 나누어주었어.” 가령 지배인들은 많이 주고 일용근로자는 쬐끔 준 것이 아니고 같이 나누어 주었고, 갈 데 없는 이들은 함께 살도록 공동협업농장을 만들어서 정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지난해 만났었다. 나보다 1~3년 더 아래인 나이였다. 채현국 이사장의 호칭이 사장님, 이사장님이 아니고 그냥 형님이라 부른다. 지금은 이상할 것도 없으나 70년대에 형님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신분 차별을 일찍이 깨신 분이라는 의미다.
(119쪽. 스승의 은혜-임락경)
굳이 규정하자면, 국수주의자들도 있고, 좌파 진보 인물들을 포함하여 그 스펙트럼이 무한하였다. 그렇다고 어느 특정 유파의 사람들을 선호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보는 기준은 “○○○ 좋은 사람이야”로 표현하시듯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가 곧은 사람인가였다. 아무리 명성이 높아도 출세만을 위하여 사람을 만나는 이기적인 인물은 쓰레기 취급하셨다.
(127쪽. 채 선생님-전종덕)
“너희는 돈이 없으니 만원이라도 내라.” 늘 두런두런하시던 선생님들이 어느 날 돈을 모아서 신문사를 만든다고 하셨다. 덕분에 명옥이랑 나는 생일선물로 한겨레 주식을 사서 주며 태어나 처음으로 주주가 되었다. 신문사를 만든다는 일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몰랐다. 언론계, 학계, 종교계, 재야 민주화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87년 창간된 한겨레 신문이 33년이 넘었다. 그 중요한 일을 하는 순간에 그 분들 주변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134쪽. 징검다리-정명숙)
나는 추우나 더우나 맨발로 다니며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말을 하는 마달이를 천재라고 생각했다. 마달이는 철없던 중학교 시절 우리와는 달리 역사를 알고 민족을 알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나쁜 말을 하지 않았던 마달이지만 대구의 유명한 친일파 후손 M군에 대해서만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대했던 기억이 난다.
(138쪽. 영원한 천재 맨발의 마달이-정상학)
채현국 선생은 서정춘 선생과는 동에서 서만큼이나 먼, 그러나 같은 ‘소년과’이다. 한 사람은 대놓고 빨치산을 노래하고 한 사람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제일 쎄게 냈던 자본가인데 둘은 묘한 부분에서 닮아있다. 지치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뭉글치도 않았고, 순수한 에너지에 반짝이는 두 눈이 ‘전부’인, ‘다부짐’을 꼭꼭 숨긴 채 허술해 뵈는 매무새까지 닮아있는 두 분이다.
(142쪽. 인사동과 나의 추억-최정인)
민병산 선생. 항상 옷차림은 거지꼴이어서 후배들이나 친지들 하고 식당에 가면 거지가 온 줄 알고 출입을 저지당하면서도 무표정이던 인사동의 철인. 그가 인사동에 나타나면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시국담이나 고담준론, 주변잡담 등을 하며 열을 올려도 하루종일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눈을 감고 있던 철인.
누군가 의문이 있어 질문하면 간단 명쾌하게 한마디 하고 다시 눈을 감고 침묵하던 선생이 아마도 우리 시대의 한국판 디오게네스가 아니었을까….
(151쪽. 거리의 철인-김낙영)
서예의 일가를 이룬 민병산의 붓글씨 전시회가 사망 두 해 전에 두 번 열렸다. 한 번은 수송동에 있는 신구대학 상설 전시관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돈화문 공간화랑에서였다.
첫 번째 전시회는 표구도 하지 않은 70점에 달하는 작품을 압핀으로 눌러 전시했는데 이 사람 저 사람 아는 사람이 구경 오면 전시한 작품 이외에 따로 준비한 작품을 공으로 나눠 주었다. 나도 그 전시회에서 몇 점의 작품을 얻었지만 수많은 인사동의 처자들도 그렇게 작품을 얻었다. 한 번은 지나다 들른 사람이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을 오래 쳐다보길래 당장 떼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는 것이 체질화된 사람이 민병산이다.
(162쪽. 인사동 그때 그 얼굴 평론가 민병산-김승환)
회갑 잔치 같은 것을 하면 어딘가로 떠나겠다고 하시더니 아주 영영 떠나셨구나. 회갑을 바로 내일 두고 오늘 세상을 떠나셨으니 하루도 틀리지 않은 만 육십 년을 채우고 가셨다. 민 선생의 장례는 어느 병원의 영안실에서 치러졌다. 많은 조객들이 찾아왔다. 회갑연이 장례식으로 바뀌어진 셈이다. 그 육신은 화장으로 처리되었고, 유골은 성둘 근교에 있는 절에 모셔졌다.
(165쪽. 기러기 훨훨-방영웅)
귀천에 가면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이라 쓰신 글의 목각판이 있었다. 최치원의 시 마지막 구절인데 ‘등전(燈前)’ 두 글자의 모양새는 고국을 향한 그리움에 말 달리듯 하는 모습이다.
또 「우기청호 청경우독(雨奇晴好 晴耕雨讀)」같은 글을 목각하면 무척 보기 좋았다. 민 선생님의 생활 자세를 쓰신 것 같아 더욱 친밀감이 느껴진다. 「정관자득 정흥무진(靜觀自得 情興無盡)」 같은 짧은 글귀는 실제로 우리의 정과 흥이 일도록 해주었다.
(174쪽. 민 선생님 추상-최혁배)
채현국과 박이엽, 두 어른의 대화는 늘 대조적이었다. 채 선생께서는, 활기 넘치고 거침없이 끌고 나가는 이야기 중에 막힘이 있을 땐, 마치 사전을 찾듯 박이엽 선생께 물어보시곤 하였는데, 가만 듣고만 계시던 박 선생은, 정교하고도 낮은 음성으로 대답을 해주시던 모습을 보았다. 무엇이든 술술 물음에 답하셨다. 마치 체화된 지식의 본산을 보여주시는 듯했다. 그때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웠던 기억이었다.
(179~180쪽. 박이엽 선생 생각-인사동에서-박구경)
“박이엽 씨는 남편감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못됐습니다. 돈 생기면 술 마시고 집안은 몰라라 했으니까요. 그러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평온을 가장한 침착한 그 말씀에 나는 앉은자리에서 몹시 심하게 공감의 고갯짓을 했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 그동안 야단과 질책에 인색한 박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닌 내 행적의 개념화이기도 했다. 남편의 평가를 그리도 잘하는 아내는 또 얼마나 드물까. 사모님 목메임에 내 눈에서도 뭔가 질척한 것이 주르륵 흘렀다.
(184~185쪽. 박이엽 선생님과 「씨칠리아 마부의 노래」-임계재)
박은국이 필명을 박이엽으로 개명한 것은 방송극을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그가 생활을 위해 순수문학을 접고 방송극을 쓰게 된 것은, 함께 문학을 하던 친구로서 섭섭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의 방송극이 단순한 대중 취향에 머물지 않고 격조 있는 본격극의 체통을 지켰음을 감안할 때, 적이 위안이 되는 일이다.
(192쪽. 늘 앞서가던 멋쟁이 박이엽-황명걸)
부대에서 빠져나오는 물품을 거래하는 밀수업자들의 장사가 성행했다. 나룻배 사공은 그 장사를 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위스키며 담배를 열 상자 스무 상자 실어다 주었다. 대형 아이스크림 제조기 같은 것도 갖다 주었다. 그렇게 가져온 물건을 받아 잘 은닉해두면 춘천시장 사람들이 차를 가져와 싣고 갔다. 밤을 타고 가져온 물건이 많을 때면 소년 계익은 밤을 타고 마라톤을 해서 20리 길 춘천시장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202쪽. 소년 뱃사공 이계익-구중관)
노촌 선생님의 삶에는 ‘물은 웅덩이를 만나면 반드시 채운 다음에 지나간다’는 영과후진(盈科後進)했던 시대가 담겨있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던 학생으로, 일제하의 식민지 사회에서는 항일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6.25전쟁 후에는 잠시 남파공작원으로, 비전향 장기수로 그리고 장기수의 생활을 마치고 나와서 돌아가실 때까지는 통일운동가, 한학자, 선비로 살아가셨다.
(208쪽. 노촌 이구영 선생님과 이문학회-이진영)
조관준의 주변에는 문인, 철학자, 언론인, 서예가, 서지학자, 승려 등 별난 사람들이 많았다. 철학 전공인 채현국도 이 집의 단골손님이었다. 청구자 민병산도 이집에 와서 즐겁게 자주 왔다. 방송작가 박이엽, 시인 천상병도 자주 이곳에 온 것으로 안다. 그는 음악광이어서 50년대에 진공관 앰프로 매킨토시를 소유했고, 덴마크제 뱅앤올슨 스피커, 영국산 콰드 오디오 기기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구입한 사람이다.
(222쪽. 알타이하우스와 조관준-이상만)
“…대한민국도 불쌍한 나라이다. …그런데 불쌍한 식구들이 억박적박 어르는 남의 싸움에 군대를 파병하는 불쌍한 나라의 지식인이다. …싸움의 경우를 알 만큼 아는 사람으로서 월남 국민에게 한없는 용서를 빈다”는 글이었다. “잘 썼는데 뭘?” 하고 내가 물었다. 숨 한 가닥 내쉴 짬도 없이 천상병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뭣이라꼬? 이 문디이 자슥아! …이 말들은 내가 썼던 말들이 아니라꼬….”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최모가 있었다. 그가 천상병에게 글을 청탁했다. 시인으로서의 느낌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었다. 몇 푼 안 되지만 원고료로 막걸리값이라도 하라는 배려가 깔려 있었다. 그 최모 기자가 잘못하면 천상병이 크게 다칠세라, 언턱거리가 될 만한 말들을 순한 말로 수정했던 것이다.
(230쪽. 평화를 쪼다 날아간 파랑새-배평모)
‘놀이’라는 말이 소리와 동작이 어울려 있어서. 결국은 우리가 오래된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탈놀이도 들어가고 다양한 놀이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인제 ‘노래’라는 말이 생겨가지고 우리가 쓰고 있으니까. 이럴 때 어떻게 ‘소리’의 내용이 ‘노래’에 다 충분히 담기느냐 하는 건 우리 글 쓰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들의 역량에 달려 있을 것 같습니다. ‘소리’는 더 오랫동안 사용되었기 때문에 소리에는 더 풍부한 뜻이 담겨있고, ‘놀이’라는 데 다 담겨 있는데. 이제 다 죽어버리고 날라리 치는 뜻으로만 된 거라.
(245쪽. 채현국·채희완 대담)
지금 나아갈 길이 일과 놀이가 구별이 안 되는 문화가 분명한데. 그리고 지금 교육도 태교만이 아니라 5세 이전의 교육이 굉장히 중요한데, 아직도 교육학계에서 그 중요성을 주장하는 나라를 나는 모릅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자본주의 착취가 절로 못 일어납니다. 놀이 자체가 즐거울뿐더러 일인데. 왜 남을 시킵니까? 내가 하지. 그 즐거움을. 실제로 감옥에서 일 못 나가는 사람들, 몸은 죄수가 되어가지고는 얼마나 일을 하러 가려고 발버둥칩니까? 뻔히 압니다. 왜 우리들이 이렇게 뭐에 지배 당해 가지고 일과 놀이가 이렇도록 가까이하기 힘들도록 분란에 끼어 있는지, 이런 사태를 강요하는 문화로 와 있는지 아주 의심해야 마땅합니다.
(250쪽. 채현국·채희완 대담)
더 중요한 것은 공감들이요. 애기들이 같이 있을 때 딴 형제가 울면 두어 달만 된 애부터는 삐죽삐죽 웁니다.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난 다음에 이동문화에서 가지고 있던 일놀이의 합일이 깨지기 시작했듯이. 지금 한 자식만 키우면 그 애기가 언제 공감을 느끼는지, 딴 형제가 울기 때문에 울음을 울던 이 공감 교육이, 교육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어요. 공감적 사태가 절로 감성적인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제 이 기회마저 애기들한테 없다는 것을 주목 안 합니다. 그럼 그 사람은 공감을 어디서 배우죠? 사이코패스라는 이상한 정신병이 이런 공감이 없다 보면 일어날 거 아닙니까? 왜 슬픈지 이치를 알아야 슬픈가? 슬퍼서 슬프지.
(254쪽. 채현국·채희완 대담)
술이라는 게 지금처럼 흔해지고 나니까 이제 독이 된 거죠. 너무 대량으로 먹으면 밥도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니 술 같이 귀하던 물건이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되어 가지고 사람을 해치는 거지. 술이 사람을 해치는 게 아니라 대량이 사람을 해칩니다.
사람이라는 건 오만 슬픈 일, 오만 어려운 일, 오만 골치 아픈 일이 다 있을 때, 정말 적은 양의 술이라는 건 얼마나 사람한테 보증적인 보약인데 그것을 전혀 하지 않다니. 술의 문제는 양의 문제입니다. 너무 다량이 공급되면 독약입니다. 완전히. 밥이 독약이듯이.
(258쪽. 채현국·채희완 대담)
욕망이 무한한 게 아니라 명예, 돈, 권력이 계속해서 자기 추구를 하는 관성이 붙어요. 욕망은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 그 사람은 물 한 주전자도 못 마시는데? 그렇잖아요? 물을 어떻게 한 주전자씩 마셔. 이런 큰 컵으로 한 컵 먹으면 두 컵 먹기도 어려운데.
(263쪽. 채현국·채희완 대담)
나한테 싫은 일은 남한테 하지 마라. 이거 말고는 정의가 없습니다. 이건 정말 만약 소크라테스를 인용해서 정의라는 소리 하고, 석가모니를 이용해 가지고 정의라는 소리 하고, 공자 이용해서 정의라는 거 전부 다 쌩거짓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정의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함께 지혜롭게 생각해 만들어 가지고 함께 나눠 먹고 하는 쪽이 그게 진짜지 정의하곤 아무 상관도 없어. 정의 개념은 독재자들의 자기 합리화입니다. 지배하는 놈들의 자기 합리화로 정의를 만듭니다. 그 대표 선수가 바로 히틀러야. 다음 더 찜 쪄 먹은 새끼가 스탈린이야.
(265쪽. 채현국·채희완 대담)
기억하고 안다는 거는 얼마나 천양지차인데. 그 얼개를 알고, 그 까닭을 알고, 그 모든 걸 이해해야 안다고 하는 거지. 그러나 뭐가 뭐다라고 하는 거는 기억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하는 걸 자꾸 안다고 우기고 살아요. 더구나 실제로 알아봤자 그거 시제는 과거입니다. 아는 순간 이미 과거 시제인데, 고정관념 따로 없습니다. 아는 거 전부가 고정관념입니다.
(272쪽.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자기 독생자를, 예수가 피를 흘려가지고 우리가 다 죄를 씻었는데, 그럼 우리 인간이 예수 죽은 이후에는 악질이 안 나와야 할 거 아닙니까? 근데 왜 악질은 이렇게 더 많습니까? 우리가 신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276쪽.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제발 미국 이긴다는 말 포기부터 먼저 하십시오. 다민족 국가 이기면 골 아픕니다. 거란족들이 중국 들어가서 거란족 사라지고, 요 금 다 거란 아닙니까. 다민족 국가 먹는 순간에 사라집니다. 청나라, 우리 눈앞에서 청이 사라졌습니다. 중국을 먹어 이겼기 때문에 사라져버렸어.
(279쪽.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저는 그 ‘통일’이라는 말 전에 ‘함께 살기’ 같은 말을 하지. ‘통일’이라는 말은 분명히 정치 용어입니다. 정부의 통일이거나, 국권의 통일이거나, 국토의 통일이거나, 어쨌든 간에 정치 용어입니다. 굳이 정치 용어 이전에 자연스러운 ‘함께 살기’란 우리말이 있는데, 함께 같이 살면 되는 거지,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거지. 통일이라는 말 꼭 쓰는 놈들은 통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안 될 수밖에 없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겁니다. 휴전선에 모든 군인들이 이제부터 안 쏘겠으니 올려면 오고 말려면 마라, 우리는 안 쏜다, 하고 선언해버리면 그만입니다.우리는 안 쏘겠다. 오든 말든 우리는 쏘지는 않겠다. 너거도 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나? 통일이라는 말은 상당히 골치 아픈 우리가 잘 모르는 정치용어입니다.
(281쪽.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평범한 사람일수록 비겁하고, 비루하고, 야비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입니다. 너무 자기 탓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진짜 너무 얇지요. 사람에 대한 사랑도, 괄시하고 멸시하고 지배할 줄만 알았지, 정말 인간이 사랑하고 사는 길 이외에는 못 산다는 인식을, 예수가 그렇게 고래고함을 질러도 그거 믿고 따르는 자 몇 안 되거든. 이런 거 잘 생각을 해서 어떻게든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좀 알면, 그래야 또 행복합니다.
(285~286쪽.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여러분 중에 젊은 사람들, 아부지 어무니가 밥 굶게 안 했기 때문에 고마운 걸 모릅니다, 젊은 아이들 탓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야 아부지 어무니 걱정을 하게 됩니다. 배고픈 아이는 우리 어무이 아부지도 배가 고플 낀데 하면서 생각을 합니다. 먹고 사는 게 아무 걱정이 없으면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아부지 뚜드려 패는 사건 많습니다. 엄마 때리는 놈도 있습니다, 정신병 아니어도. 고마운 줄 모르면 별 일이 다 납니다.
(286쪽.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나처럼 한 80살 되면 죽으면 됩니다. 왜 자꾸 살라고 수술을 받고 왜 그래요? 좀비 될라고 지가 빽 쓰는 겁니다. 실제로 이번에 내가 해보니까, 모든 의학과 약학은 좀비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인간을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 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번에 당해보니까 그렇습니다.
(287쪽. 부산무위당학교 강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건달할배 채현국과 친구들>은 말 그대로 ‘시대의 어른’ 채현국과 그 친구들과 함께했던 여러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워하며 쓴 글들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그것이 단순한 회고담이나 추억담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와 그 이전, 그리고 1980년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경험했던 현대사의 장면들이 책의 갈피에 녹아들어 있다. ‘건달할배’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대로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 질곡과 고난의 한 시대를 살아내면서 그 요구와 아픔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채현국 선생이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스펙트럼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다양하고 광범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평소 선생이 어떤 이념이나 정치 성향에 매이지 않고 ‘사람됨’에 집중한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얼마나 곧은가가 사람을 보는 기준이었다. 그래서 재벌그룹 총수나 정보기관의 수장,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나 이름 높은 문필가에서 변방의 장삼이사까지 두루 임의롭게 사귈 수 있었던 모양이다.
끝자락 부록에 실은 좌담과 강연은 선생이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알려주는 것들이다. 세상의 상식과 고정관념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과 경험과 사고를 바탕으로 삼아 자유로우면서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결론을 끌어내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이리 내치고 저리 달리는 발언에서는 선생의 호연지기와 자유분방함도 느껴진다. 70년 지기 백낙청 문학평론가는 “그는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완전히 확실치 않은 것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단정적인 발언들이 통쾌할 적이 더 많았으므로 나는 굳이 이견을 내고 다투려 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채현국 선생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뱉는 말들이 모두 이치에 맞아야 한다면 스트레스를 얼마나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어디에도 완전한 것은 없고 사람들이 줏대 있게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되고 힘이 되는 말이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주제어: 채현국, 인물, 현대사, 민주화운동, 꼰대, 어른, 쓴맛, 단맛, 민병산, 박이엽, 이구영, 천상병, 이계익, 조관준
분류: 사회과학, 한국사, 인물